최치원은 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시인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 시험에 합격하고 벼슬을 지낸 그는 이후 절도사 고변의 종사관으로 병영 막사를 따라다니며 각종 문서를 정리하고 썼다. 특히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인 황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쓴 격문은 상대방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빼어나다. 신라에 귀국한 후 최치원은 개혁안인 시무 10여조를 진성왕에게 바쳤으나 무위로 끝난다.
최치원은 제국 당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으며 천 년 왕국 신라의 쇠락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결국 가야산으로 은거에 들어간다. 해인사에 머무른 흔적이 있으며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최치원의 마지막을 아는 이는 없다. 그는 전국을 정처없이 유랑하였던 듯하다. 그의 흔적이 곳곳에 전해내려오기 때문이다. 최치원 관련 전설이 많은 것으로보아 그의 능력을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계급사회였던 신라에서 육두품인 최치원이 그의 기량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며 천 년 전 최치원이 왕명으로 고승들을 위해 쓴 네 분의 비문, 사산비명이 현재 남아 있는 것도 신비스럽다. 쌍계사 대웅전 마당에는 그가 쓴 진감선사대공탑비가 세워져 있다. 세월의 흔적이 스쳐가기는 했어도 그의 높은 식견과 필체를 확인하는 마음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문중 사당에 하루 날을 잡아 찾아가던 날은 봄날이었다. 최치원이 당나라로 갈 때나 돌아올 때도 따뜻한 봄날이었다. 신선의 면모를 지닌 그는 넉넉한 풍채와 도인 같은 모습으로 살아 있었다. 촛불을 켜고 배향한 후 마주 앉아 그의 안식을 위해 기원을 했다.
--- 「중편소설 최치원-유시연」 중에서
이규보(1168~1241)는 고려시대 신흥 사대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이다. 그가 남긴 시들은 당대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시풍을 견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깊다. 당시 많은 문인들이 형식미를 강조하며 선인들의 문장을 차용해 자신들의 시를 지었던 것과는 달리 이규보는 고문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롯이 자신이 보고 느끼는 생각과 감흥을 자유롭게 시와 산문으로 남김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형성했다. 특히 그는 민족서사시인 ‘동명왕편’을 비롯해 술을 의인화한 소설 ‘국선생전’ 같은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 고려시대의 문학사적 지평을 넓히고 민족애와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몽골의 황제에게 보낸 진정표로 나라를 구한 이야기가 가장 극적이다. 하지만 이규보에 관해서는 두 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당대의 대문장가로서 시성(詩聖)이라는 평가와 함께 최충헌과 최우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시절, 지나치게 그들과 밀착된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그가 남긴 시는 팔천여 수에 이르나 안타깝게도 현재 전하는 시는 이천여 수에 불과하다.
--- 「중편소설 이규보- 은미희」 중에서
‘오세 신동’이라 일컬어지는 김시습도 과거에 한 번 낙방한 적이 있다. 그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신 친모의 시묘살이 3년을 마쳤을 무렵, 단종이 즉위하고 나서 처음 시행한 과거시험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절망에 빠져 있을 바로 시기에 수양대군이 어린 임금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김시습은 거꾸로 가는 세상을 한탄하며 불문에 들기 위해 입산한다. 이때 그가 출가하여 노승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설잠’이었다. 그러나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단종 복위 사건으로 사육신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당하자, 김시습은 하산하여 그 시신들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장례를 지낸다. 이때부터 김시습의 방랑 생활은 시작되었으며, 나이 서른 살이 훌쩍 넘어서부터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에 토굴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금오신화』다.
--- 「단편소설 김시습- 엄광용」 중에서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창작한 허균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의 시각, 관점과도 일치하는 선진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는 서자였던 손곡 이달을 시를 짓는 스승으로 모셨다. 주위엔 재능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던 막역지우가 많았다. 그런 당시 전근대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를 그들과 같이 가슴으로 느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고지하고, 스스로에겐 개혁의 의지를 담아 작품에 형상화했던 것이다. 그는 ‘홍길동’이 건설하고자 했던 이상국, ‘율도국’을 ‘강변칠우’와 조선에 세우려고 했다는 모반죄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진취적인 기상의 소유자였기에 「장생전」· 「남궁선생전」 같은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다.
--- 「단편소설 허균-정라헬」 중에서
송강 정철은 조선조 당파싸움의 격랑을 앞장서서 헤쳐온 당대의 정치인이다.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가도 여러 차례 유배를 거듭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늘 자신이 서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탓에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냉혹하고 너무 당리당략에 치우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을 걸으면서도 그가 문학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 사미인곡과 같은 빼어난 작품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시조에도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는 특히 고집이 셌으며 술과 여자를 사랑했다. 그것 때문에 조정이 여러 사람에게 지탄받기도 했으나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술과 여자와 문학과 정치,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그것뿐이었다.
--- 「단편소설 정철-정수남」 중에서
고산 윤선도는 그의 시조 작품들이 실려 있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나 역시 「어부사시사」를 통해 그를 만났고, 실은 그게 내가 고산에 관해 알고 있는 전부이기도 했다. 이 소설을 쓰면서 재발견한 윤선도는 꽤나 다채로운 인생을 산 인물이었다. 부유한 지방 호족 출신이면서 풍수지리, 의학, 음악 등에도 두루 해박했던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다분히 다혈질의 성정을 가진 인물로 보였는데, 주로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에는 화를 당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일생동안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총 십 년이 되지 않았고 세 번에 걸친 유배생활이 십 오년에 달했다. 세 번의 유배는 모두 그가 올린 상소가 직접 원인이었다. 유배와 칩거 생활 중에 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들을 창작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뜨겁고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한 인간의 인생을 톺아보는 것만으로도 인생 공부가 되리라 믿는다.
--- 「단편소설 윤선도-마린」 중에서
단편소설 「김만중」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면서, 우리나라 소설 문학의 선구자이자, 한글 소설을 널리 퍼뜨린 김만중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다. 김만중의 효심과 인물됨과 사상과 유배 생활의 결과물인 소설 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일생을 되짚었다. 조선의 정치가가 아니라, 기기묘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셰헤라자데처럼 풀어내는, 문인으로서의 인간 김만중을 만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구운몽』은 1922년 선교사에 의해 번역되어 세계에 퍼져나갔을 정도로, 환상성을 품은 작품이다. 현대인도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재미와 교훈을 주는 판타지 소설이자 교양 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구운몽〉이 나오기까지의 배경이 되는 유배지 생활과 한글 소설을 쓰게 된 계기와 그의 문학작품 속에 담긴 세계관과 사상이 담겨있다. 부귀영화의 세속적 성공이 얼마나 덧없나를 깨닫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독자들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단편소설 김만중-김민주」 중에서
연암 박지원의 문장은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다. 그의 문체는 자유롭고 진지하면서 경쾌했다. 특히 『열하일기』가 나온 후 젊은이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는데 심지어 과거시험 답안지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였다. 이에 대해 기존 사대부를 비롯한 집권층의 반발이 컸다. 그들은 당파적 견해차와 정치적 노림수에 의해 박지원을 헐뜯고 비방하였다. 급기야 임금마저 박지원을 비판하며 고문을 부활시키고 타락한 문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문체반정(文體反正)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연암의 문체를 좋아했고, 그 역시 자신의 시각과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암의 문장은 느리지만 널리 퍼져나갔다.
--- 「단편소설 박지원-하아무」 중에서
조선 후기, 일부 세도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부터 그동안 조선 사회에서 유지되어 오던 신분사회의 질서가 바뀌어 가고 경제적인 변화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병폐는 관료진출의 유일한 길이었던 과거제도가 문란해진 점이었다. 권력의 힘으로 합격이 좌우되던 어긋난 시절, 김병연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을 떠돌며 유리걸식하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길 무려 40여 년. 그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진솔하면서도 친근한 벗으로 살다 간 풍류가객이었다. 평안도 농민전쟁 당시 홍경래에게 항복한 김익순이 그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과거 시험장에서 할아버지를 욕 먹였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삿갓을 써서 하늘을 가린 채로 평생을 산 것이라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할아버지처럼 세도가 양반들에게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뒤에서 양반들 세태를 비꼬기만 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평생 삿갓을 쓰고 발밑을 내려다보며 살았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화순)에서 객사했지만 그가 남긴 민중시는 언제까지라도 우리 가슴 속에 생생히 남아있을 것이다.
--- 「단편소설 김삿갓-채희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