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이상적인 부부상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지난 20년 동안 지켜본 승혁 부부를 떠올릴 정도로 그들 부부의 애정은 완벽해 보였다. 또 그 기간 동안 승혁은 미국 건축설계 분야에서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영향력 있는 설계사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터여서, 그들 세 가족의 미래에는 느긋한 인생의 순항이 계속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p.11
성공…… 상대적인 것으로 끝이 없는 거다. 성공이라는 요물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지. 가족…… 가족의 훈훈함은 좋은 거다. 그러나 훈훈함을 맛보는 대가로 가식을 가져야 돼. 그 훈훈함이 가식이 주는 고통을 보상하지는 못해. 사랑…… 바로 속박의 굴레다.--- p.30
이 해방감은 가족으로부터, 직장으로부터, 시간이라는 시한폭탄으로부터 그리고 애환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에서 오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득 이러한 해방감이 승혁이 말했던 해방과 그 형태는 다르다 하더라도 원천을 파고들면 같은 맥락이 아닐까 자문해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승혁이 추구하는 해방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극적인 형태인 반면, 내가 무의식적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탈출만을 위한 소극적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p.34-35
자물쇠가 잠긴 방의 창호지 한 귀퉁이를 벗겨 손전등을 집어넣고 천장을 향해 비춰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검은색으로 그려진 해골들과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마귀할멈의 모습이 보였다. 글씨도 많이 씌어져 있었으나, 대부분의 글씨는 작아서 알아볼 수 없었고 붓으로 쓴 큰 글씨만이 보였다. ‘mediocrity’(평범)와 ‘horror’(공포)라는 영어 단어가 여러 군데 씌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창호지를 원래의 모양대로 붙이고 나서 그곳을 떠났다.--- p.69-70
“큰돈을 갖게 되면 인간의 본성이 없는 사람을 측은히 생각하게 되어 있어. 그게 컴패션, 바로 연민이지. 그런데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업신여기거나 경멸하게 되는 순간부터 있는 자도 파괴되기 시작해……. 그리고 ‘없는 자’가 ‘있는 자’의 경멸을 감지하게 되면 증오심을 갖게 돼……. 결국 ‘있는 자’의 경멸과 ‘없는 자’의 증오심이 충돌하게 되고 그것이 인류 역사의 계층의 전쟁, 즉 클래스 워(class war)야.”--- p.73-74
오늘 저녁에 경험한 것이 바로 인생의 축소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험한 파도, 칠흑 같은 어둠, 불안 속에 위태로이 떠가는 작은 배, 배 안에 있는 온갖 잡생각으로 머리를 채운 인간들, 그리고…… 그리고 권력과 조직을 대변하는 서치라이트, 그 서치라이트는 필요에 따라 인간의 약점을 환히 드러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고력도 마비시킬 수 있다.--- p.78
“호러(horror), 호러…… 공포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데서 오는 공포?”
내가 빈정대었다.
“아니, 미디오크러티(mediocrity)에 대한 공포지.”
“미디오크러티는 너도 알다시피 미디오커(mediocre), 즉 미들(middle)의 명사형으로 평범이라는 뜻이다. 중도(中道)를 의미하지. 동양철학에서 중도라는 개념은 최선을 의미하고, 무엇이든 ‘적당히’ 하라는 거야. 그러나 그 ‘적당히’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모든 미덕의 근원이지.”--- p.101
그렇다. 승혁은 멋지게 인생을 끝마치는 행운아가 돼야 한다. 승혁은 우리 모두를 철저하게 조롱해야 한다. 우리 속에 갇혀 던져주는 음식 찌꺼기를 배불리 먹고 사는 돼지를 비웃듯이, 새장 속에 갇힌 새들을 조롱하듯이 우리 모두를 조롱해야 한다. 그는 깊은 산속을 거침없이 뛰어다니며 먹이를 찾는 산돼지가 되어, 파란 창공을 나는 한 마리의 야생조가 되어 돼지우리나 새장에 갇힌 우리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