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매우 주목해야 할 것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텍스트를 위해 고정시킨 장소, 그의 관점의 장소가 군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는 결정적인 정치적 실천의 '주체'로 결정되고 있지만, 인민이라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통치자에게 헌정하는 책의 서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서도 서슴없이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통치자들의 성격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민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따라서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통치자들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민의 관점을 제외하고서는 통치자들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하여 통치자들의 관점을 제외하고서는 인민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을 수 없다는 단언은 위의 언명을 적합하게 하는 슬기로운 방식처럼 여겨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는 인민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인민론』이란 제목의 선언을 집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나아가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인민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특정 군주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군주들의 본성을 알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합의하는 바는 여러 부류가 있다는 것, 따라서 인민의 관점으로부터 그들 중에서 선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 pp.53-54
우리는 이로부터 그의 일반 명제들, 그의 역사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 명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그것들을 모든 가능한 대상들의 일반적 진리로 간주하여 특수하고 구체적인 대상에 적용하기는커녕, 그 명제들을 배열하여 차례차례 부정하면서 규정한다. 그가 이렇게하는 이유는, 철학적 원리와 개념적 모체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신의 고유한 이론적 토대 위에서, 그 명제들로부터는 전혀 연역할 수 없는 개념들을 생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자 그대로 본다면, 이 명제들은 모순적이며, 그것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효과는 어떤 담론도 미리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배열된 상태에서 고려된다면, 그 배치와 상호작용, 비일관성은 새로운 이론적 공간과 정확한 개념적 효과들을 생산하게 된다.
---p.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