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혼돈, 문화, 소음 그리고 흥분이 나를 에워싼다. 편안하다. 여기 뉴욕의 거리를 걷다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다채로운 기회들. 26년 동안 소식 한 자 듣지 못했던 유년 시절의 친구와 마주치거나 유니언 스퀘어에서 조직적으로 벌어지는 베개 싸움을 목격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음 날 신문에서나 보게 될 남자와 택시 합승을 하거나 아니면 아보카도 맛 아이스크림을 맛볼지도….(7쪽)
내가 자랄 때는 타임스 스퀘어에 핍쇼 업소들이 넘쳐나고 노숙자들이 득실득실했다. 그때의 타임스 스퀘어는 사람들이 가짜 신분증을 사러 가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갈 때마다 자동차를 도둑맞지 않기 위해 애를 쓰셨는데, 막대기같이 생긴 ‘클럽’이란 잠금장치로 핸들을 채워놓거나, 누군가 오디오를 훔치려고 차창을 깨는 일이 없도록 오디오 앞판을 떼어내시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한번은, 25센트짜리 동전 한 묶음 때문에 차 유리가 깨졌는데, 눈에 뜨이는 곳에 동전을 무심코 두어서 생긴 일이었다. 낙서투성이 지하철도 기억이 난다. 사방이 온통 낙서 천지였다.(22쪽)
그랜드 센트럴 역 아래층 식당가의 오이스터 바 앞에는 ‘속삭임의 회랑’이 있다. 아치형 세라믹 구조물 한쪽 끝에 서서 속삭이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아치형 곡선부의 울림이 소리를 전달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덕분에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한다든가, 커플끼리만 가능한 야한 이야기를 속삭이는 곳으로 알려져서 뉴욕의 명소로 떠올랐다.(32쪽)
브래지어를 사려면 오차드 코르셋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친구와 함께 직접 가보기로 했다. 아름다운 속옷 가게를 상상했건만, 빛바랜 간판에 진열창은 횅댕그렁하게 비어 있고 콧구멍만 한 출입구는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은 곳이었다. 그 조그만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진열된 물건은 하나도 없는 데다 상자들만 가득 쌓여 있는데, 상자 겉면에는 르 미스떼르, 레이디 마를렌 같은 브래지어 상표들이 조잡하게 붙어 있었다. 계산대 뒤에는 유대교 일파인 하시드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씩씩해 보이는 여자가 나를 가게 안쪽의 커튼 뒤로 데려가더니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브래지어만 걸친 채 서 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여자는 내 브래지어 사이즈가 C컵(지금까지 계속 C컵인 줄 알고 있었는데)이 아니라 B컵이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브래지어 하나를 쑥 들이밀며 입어보라고 명령을 내리더니 내가 새 브래지어를 입어보는 동안 옆에서 내내 지켜보고 서 있었다. 브래지어는 내 가슴에 딱 맞았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88쪽)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경기장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승객 모두가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생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끼리 선수들을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고, 남편은 엉뚱한 팀을 응원한다는 이유로 다소 놀림을 받는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나들이의 백미는 경기장에서 베지 도그를 주문해 독일식 양배추 절임인 사우어크라우트를 넣고 겨자를 듬뿍 뿌려 먹는 맛이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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