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션 2. 낮은 자세로 마음을 파고 들어라
2010년 6월 강북경찰서장직을 사직하고 이 궁리 저 궁리하다가 동네 오리고기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무엇인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경찰서장을 했다는 타이들만 가지고는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격에 어울리는 제대로 된 일을 찾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 전에 무엇이라도 일을 찾아 해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 동네 형님이 오리전문 식당을 개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업하며 새로운 일손이 필요할 것 같아 자청하여 일하겠다고 제의했다. 50평 정도 되는 제법 큰 식당이었다. 얼마나 제대로 할지 자신이 없어 월급에 대한 약정이 없이 일단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강북지역에 아는 인맥이 있어 내 손님이 많아 장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 인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상당한 월급을 줄 것이다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했다. 그리고 퇴직한 마당에 계급장에 대한 미련과 추억까지도 버리고 바닦부터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래야 생존력이 생긴다면서 스스로를 다 잡았다. 그 힘으로 부끄러움과 자존심을 억누르고 식당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식당일은 크게 주방 일과 홀서빙 일이 있다. 나는 당연히 주방 일은 모르기 때문에 홀서빙을 하게 되었다. 손님의 주문을 받아 음식을 차려주고 다 먹고 나면 치우고. 혹시라도 나이든 남자 홀서빙에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음식 주문은 홀 아주머니에게 미루고 나는 음식 치우는 일에 전념했다. 무릎을 꿇고 음식 그릇을 비우고, 상위의 흩어진 음식 찌꺼기를 치우고...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불편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침 아직 몸이 유연하고 건강하기 때문에 홀 서빙하는데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힘든 일은 따로 있었다. 식당 홀은 사무실과 달리 책상은 물론이고 앉을 의자가 없었다. 25년 직장생활하며 항상 내 의자가 있었는데 같은 직장인데도 여기는 의자가 없었다. 의자가 없기 때문에 앉을 수 없었고 앉으면 안되었다. 마침 손님이 없어 할 일이 마땅하게 없는데도 앉을 수 가 없었다. 홀 어딘가에 서 있어야 했는데 마땅히 서있을 곳이 없었다. 주방 쪽에 서 있을 수도 없고, 주인이 있는 카운터 쪽에 서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홀 중앙에 엉거주춤 서있을 수도 없고. 육체적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어지지 시작했다. 그러던 중 또 하나의 어려움이 닥쳤다. 목이 마려 물이 먹고 싶었는데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홀 한쪽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냉장고가 있고 그 속에 물통 여러 개가 보였지만 그 물통을 꺼내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 물은 손님 것이었고 나는 종업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카운터에 안주인이 서 있는데 종업원인 내가 손님께 드릴 물을 자연스럽게 꺼내 마실 수가 없었다. 아 이것이 종업원의 신세구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왠지 슬퍼졌다. 식당일을 하면서 먹는 물 때문에 힘들고 슬퍼질 것이라고 전혀 상상 못했는데 전혀 엉뚱한 상황 앞에서 힘들어 진 것이다. 참았다. 식당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면서 화장실 물을 마셨다. 왠지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 같아 속이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일이 밤 10시가 넘어 끝났다. 홀 상위에는 늦게까지 먹다 귀가한 손님들의 치우지 않은 음식물이 남아있었지만 내일 아침에 치워도 된다는 주인의 지시가 있어 11시가 다 되어 퇴근했다. 앉을 의자도 없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지만 퇴근길 마음은 홀가분했다. 심리적으로 불편했고 육체적으로 힘든 식당일이지만 해냈다는 뿌듯함과 나도 경찰 아닌 일반 사회 생활에 드디어 적응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평가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잘 퇴직했다고 생각이 든다. 하는 일없어 월급 도둑질하는 것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월급받는 이런 식당일이 훨씬 당당한 일이다 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퇴근 길을 재촉했다. 집에 들어가 각시에게도 내가 잘 사회에 적응하고 있음을 무용담을 섞어가며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원칙은 출근시간이 오전 10시 이지만, 식당 주인과의 인연도 있고, 어제 입사한 초년병으로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어 8시 30분에 출근했다. 어제 미처 치우지 못한 음식물을 치웠다. 상 밑에 숨겨논 담배 꽁초는 물론 흠뻑 젖은 휴지까지 치웠다. 같은 음식물이라도 남이 먹다 남은 것은 훨씬 지저분해 보인다. 가끔 깨끚하게 먹고 정갈하게 남겨진 그릇을 누군지 몰라도 예뻐 보이고 존경하고 싶어진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깨끚하게 먹고 대충이라도 치우고 일어날 일이다. 그러면 사랑받고 존경받게 될 것이다.
점심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 홀에서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와 마주 앉아 마늘을 깠다. 마늘 한쪽을 3쪽으로 나누는 것이다. 2쪽으로 나누면 너무 헤프기 때문에 3쪽으로 나눠야 하는데 작은 마늘을 3쪽으로 나누기가 그리 쉽지 않다. 마늘을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제 입사하면서 주인과 자세히 이야기 하지 못한 근무시간, 월급 등을 집중적으로 물었다. 근무시간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이고, 일주일에 돌아가며 하루씩 쉬고, 월급은 130만원. 쉬는 것을 매 일요일에 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쉬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하루 12시간 일하고 월급 130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적었다. 앉을 자리도 없이 꼬박 서서 12시간을 일하는데 겨우 130만원 이라니. 그 동안 경찰서장 하면서 하는 것도 없이 500여만을 받은 것이 부끄러워졌다. 진짜로 고생을 견디며 잘 살아 보려는 사람들에게 월 130만원은 결코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의 굴레로 느껴졌다. 어떻게 생활비 쓰고 저축하여 부자가 된단 말인가? 식당일을 해서는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아주머니 입장에서는 식당 서빙을 팔자려니 생각하며 일하는 것 같았다.
11시 30분쯤 되니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바빠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음식물을 나르고 있는데 강북지역 녹색어머니회 회장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을 회식 장소로 예약을 했나 보다. 나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인사했고, 이곳 식당에서 생활체험을 하고 있다고 마침 종업원이 아닌 것처럼 묻지도 않는 설명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회장단이 자리를 잡고 나는 홀 아주머니와 음식 그릇을 들고 회장단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회장단들이 일어서며 “서장님! 왜 이러세요?”라고 질겁을 하며 내 팔목을 잡고, 한쪽에서는 자기들이 주방에서 음식을 직접 가져오겠다고 일어선다. 내가 날라다 주는 음식을 앉아서 받아 먹기가 영 불편했던 것이다. 조용했던 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음식을 나르려는 나와 이를 사양하는 손님사이에 소란이 생긴 것이다. 개업한 식당 도와주려 왔다가 오히려 망칠 형편이 되어 버렸다.
내 마음과 달리 음식 서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자존심도 버리고 진짜 월 130만원 받는 서민이 되어 묵묵히 일하려고 했는데 주위 여건이 받아주지 않는다. 내가 계속 이곳 식당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손님을 마음적으로 불편하게 한다면 그 손님은 다음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 식당일도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 진짜 식당일을 하려면 아무도 모르는 타 지역에 가서 일을 해야지 아는 동네에서 할 일은 아니다는 확신이 들었다. 식당일을 하며 마음을 다 잡으려 했는데 이제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결국 이틀 일하고 삼일 째는 출근하지 않았다. 출근할 수 없었다. 오리고기집 일을 더 망치기 전에 식당일을 피해야 했다.
(1) 진정성과 겸손을 보여라.
오리식당에 나가지 않고 쉬고 있는데 지역 관할 정보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아삼거리에 혼수백화점이 있는데 주인과 대화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것 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지하까지 4층 건물인데 1층에서 이불을 팔고 있고 2층은 생활용품 전문점으로 세를 주었는데 나머지는 창고 비슷하게 먼지가 수북하게 있을 뿐 영업하지 않고 있었다. 왜 영업하지 않는냐고 물어보니 현재 인테리어 계획인데, 그 이후에 종합 백화점으로 화려하게 오픈할 계획이라고 답한다. 그 비어있는 건물을 보면서 건물의 일부를 활용하여 풍덩예술학교를 그럴 듯하게 확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숭인시장 학교에는 음악실이 없는데 혼수백화점 한쪽에 음악실을 운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관심을 나타냈다. 다른 백화점에도 문화센타가 있어 백화점 활성화에 도움이 되듯이 혼수백화점에도 문화센타와 같은 풍덩예술학교가 들어서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주인은 긍정도 부정도 안하면서 혼수백화점을 종합백화점으로 오픈할 계획인데 그 때 종합백화점 총괄업무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괜찮은 제안같았다. 비록 공적인 영역에서 일은 아니지만 백화점 총괄업무는 사회 경험을 쌓는데도 도움이 될 것같아 일단 같이 해보자고 답한 뒤 거의 매일 출근했다. 월급받겠다고 정식 계약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강북구청앞 법률사무소도 다니고 각종 모임, 봉사활동에도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어 백화점에 드나들었다. 일단 수입이 없어 불안하기는 했지만 월급을 받으면 억매일 것 같아 월급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봉사 차원에서 일을 해주었다. 여주인은 나이가 78세인데 바짝 마른 놈에 정신력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서 2~3시간씩 누워있는 것을 보면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주인과 강남 집을 가게 되었다. 지난 장마 때 비가 많이 내려 윗집에서 물이 흘러들어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물을 빼서 원상복구하는 것은 물론, 건물 지하에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다시는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라는 요구이었다. 윗집은 단독을 허물고 빌라를 다 지어 놓고 준공검사를 신청중이었는데 배수시설을 하지 않으면 준공허가를 받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초구청 민원실에 가서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여주인이 시키는데로 내가 진정서를 쓰고 제출하였다. 말귀를 알아듣고 분쟁이 있을 때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키기 편한지 구청에서 가게앞 적치물 단속이 나와도 부르고, 간판이 바람이 흔들려도 나를 불렀다. 경기도 농장에도 데리고 갔다. 넓은 땅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여기와서 일하라고 은근히 소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날 월급을 200만원 주겠다고 제안했다. 일단 승낙은 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월급을 받게 되면 이불가게에 완전히 억매일 것이 걱정되었다. 아침 7:30 출근하여 저녁 9:30에 퇴근하고, 물론 토요일도 똑같이 일을 하고, 일요일은 주인과 함께 교회를 가야 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내 시간은 전혀 없는 것이다. 풍덩예술학교도 관리하고, 앞으로를 대비하여 모임도 하고, 인맥도 관리해야 하는데 단돈 200만원 받겠다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여주인은 그 동안 돈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킨 것이 미안했는지 건물 통로옆 3~4평되는 가게에서 장사를 해보도록 권유하였다. 그곳에서 옷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아버지께 연락하여 메리야스를 얻어 왔다. 작은 아버지는 30년 이상 멜리야스 장사를 해 왔기 때문에 다양한 옷을 싸게 구입하는 길을 알고 있기에 연락드린 것이다. 작은 아버지는 “네가 무슨 장사냐”고 선듯 내켜하지 않았지만 내가 포천 공장까지 찾아가서 조르자 메리야스 뿐만 아니라 티까지 헐값에 주었다. 가게 안에는 걸어 놓고, 밖에는 노점처럼 깔아 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용인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까지 오셔서 각시와 함께 옷을 팔았다. 나는 아침 일찍 가게로 나가 주변을 청소했다. 지난 밤 지나는 행인이 버린 담배꽁초, 쓰레기 등을 치웠다. 그러다 보면 아는 동네 사람도 만나고, 경찰서장하면서 인사한 지역 유지도 만났으나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옷 장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밤에는 각시와 함께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에 나가 팔 물건을 구입했다. 작은 아버지가 준 메리야스 만으로는 구색이 맞지 않아 겉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물건 볼줄 모를 뿐 아니라, 시장 통로가 비좁아 2사람이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단부근에서 이미 산 옷을 들고 각시가 오기만 기다렸다. 새벽이 오면 엄청 졸렸지만 가게를 돌아 다니며 물건을 고르고 있을 각시를 생각하며 참았다. 손님이 가장 좋아할 옷을 고르는지 어떤 때는 새벽2시, 3시까지 시장을 돌아다니곤 하였다. 이렇게 고르고 골라 구입한 옷도 몇 일 동안 팔리지 않으면 빨리 새것으로 교환해야 한다. 엄청 힘들고 고생스런 나들이었지만 시장속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느꼈다. 물건을 너무 많이 사서 질질 끌고 가거나, 휘청휘청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와 열기가 느껴졌다. 공무원하면서 흐느적 흐느적 이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확히 1개월이 되자 여주인이 장사를 계속하려면 월세 400만원을 내라고 요구했다. 그 동안은 도와주는 차원에서 무료로 장사를 하도록 한 것이고, 이제부터는 제대로 임대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비록 자리가 괜찮다고 할지라도 월 400만원은 말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세상이 이렇구나. 피도 눈물도 없구나. 장소를 좀 더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이미 사 논 물건이 많이 있는데 어쩌지. 재고를 처분할 시간을 몇 일 달라고 부탁했으나 단 하루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미적미적하자 새달 1일부터 엘리베이터 공사를 해야 한다며 말일 저녁까지 비우라고 여러 번 경고성 발언을 한다. 할 수 없이 말일 날 저녁 그 많은 물건을 집으로 옮겼다. 그 동안 벌었던 돈에서 재고를 제하고 나니 번 것이 하나도 없다. 남은 것이 있다면 재고뿐. 그 여주인과 좋게 시작한 인연이 악연으로 끝났다. 진짜 엘리베이터 공사하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에게 가게를 세 준 것이다. 이 엄청난 배신감. 사회란 이렇게 속고 속이는 것인가?
1) 신체적 정신적 모멸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도대체 가족들이 무슨 돈으로 먹고 쓰는지 알 수가 없다. 경찰서장 하면서는 월급 통장에 찍히는 실수령액이 350만원 정도이었고, 내 개인적으로는 판공비, 개인 통장에 입금되는 수당 등이 있어 각시에게 별도 용돈을 전혀 받아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그렇지 못다. 현재 수입은 매월 통장에 들어오는 연금이 50만원. 실제는 100만원인데 큰 아이 학자금 대출에 대한 상환이 있어 매월 50만원씩만 받고 있다. 군장대학에 강의 다니면서 월 70만원 정도 받았는데 교통비를 제외하면 월 50만원 정도 수입이 있을테고, 풍덩예술학교에서 스피치 강의를 하면서 10만원 정도 벌고. 각시가 동네 초등학생을 상대로 과외를 하면서 1달에 20만원 수입이 있으니. 총 130만원 수입이 있는 셈이다. 경찰서장 할 때와 비교하여 절반도 안되는 수입이다. 게다가 관용차도 없고 지역 유지들에게 대접받는 것도 없어 이 모든 것을 계산하면 엄청난 수입의 차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까? 첫째는 씀씀이를 엄청 줄였다. 줄이려고 노력했다기 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줄었다. 스스로 하는 외식은 전혀 없었고, 소신발언 이후로 옷도 거의 사지 않았다. 그전에 있던 것, 사용하던 것을 아껴 사용하며 어려움을 견디었다.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딜 작정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예상 못한 것이 아니기에 전혀 어려움이 아니다 면서 버티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견디는 것보다 마음 아픈 것이 따로 있었다. 나도 남처럼 지인에게 식사나 술을 한잔 사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비용이 많이 나올까봐 이 계산, 저 계산을 하면서 먼저 계산하는 것을 망설이게 되고, 어쩌다 모임을 하게 되어도 주위 사람들이 내가 계산하도록 그냥 놓아두지를 않는다. 함께하는 자리에서 예전처럼 폼나게 한잔사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가정형편이 어려울 경우 심한 콤플렉스를 느낀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를 하지 않거나, 심지어 어느 동네에 사는지 조차 비밀로 하기도 한다. 이러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더욱 옷으로 사치를 하기도 하고, 더 비싼 자동차를 타며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또한 얼굴, 몸 등 신체에 대한 컴프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가난을 빗대거나 몸이 뚱뚱하다든지, 못생겼다는 말 등을 사용하는 것은 대화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 소지가 있으므로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최근 문제되는 것이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며 참석 여성에게 성적 모멸감을 주는 경우이다. 말하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분위기를 유도하기 위해서 유머라고 생각하며 했을지 몰라도 참석자중 누구라도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꼈다면 행사장 분위기가 엉망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발언은 절대해서는 안 된다.
여러 명이 회의 등을 하며 집중하고 있는데 일부 참석자들끼리 잡담을 하거나,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전체적인 행사 분위기를 망치는 길이 된다. 대화하는 중에 그 자리에 있지 않은 타인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비난할 경우,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 자기를 또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종교, 정치적인 이야기를 무분별하게 꺼낼 경우 상대방을 자극할 수 있다. 종교. 정치 이야기를 꺼낼 경우 행사장 분위기가 둘로 나뉘거나 이상하게 흐를 수 있다. 동일한 종교, 정치단체 행사라면 괜찮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주제는 거론을 피하는 것이 좋다. 나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자칫 설교하듯이 대화하는 경우가 생긴다. 누구나 대등하게 이야기하는 좋아한다. 따라서 설교하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2) 지나친 자랑은 모두를 피곤하게 한다.
스피치를 강의하면서 종종 겪게 되는 사례가 어떤 발표를 시켜도 결론은 자기 자녀 자랑으로 끝나는 경우이다. 자기 소개를 시켜도 자녀 이야기를 꺼내고,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시켜도 자기 자녀가 자신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식이다. 본인은 자랑이 아니라 청소년을 잘 선도한 사례를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듣는 사람은 결국 자랑으로 들리는 것이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거나, 자기 자녀 자랑하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바른 스피치의 자세가 아니다. 본인은 좀더 생생한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스피치하는 사람의 경험 수준이며 교류하는 정도가 겨우 가족수준밖에 안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어는 직장 면접관이 대상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왜 그 사람을 그렇게 존경하는가를 물었을 때, 세계적인 인물을 말하는 경우와 자신의 아버지를 말하는 경우에 자신의 아버지를 말한 대상자에게 적은 점수를 주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를 모르고, 겨우 아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적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요즈음 외국어 사용 빈도가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유식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아무런 생각없이 외국어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여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분위기에 맞게 사용하거나 꼭 써야 할 경우에만 절제하며 사용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행사 이후 리셉센에서 음식을 먹게 되거나, 음식을 먹으면서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 맛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음식의 질이 나쁘다던지, 농약 등에 오염되었다고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것은 대화분위기를 어색하게 한다. 특히 특정 음식에 대해 외국산이므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먹으면 비만해 진다고 말하여 방금 전 이를 맛있게 먹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 것은 피해야 할 태도이다.
3) 과도한 겸손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다.
스피치를 할 때 마다 “ 준비가 부족하여 죄송합니다.”, “당초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섰습니다. 못하더라도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처럼 단상에 서거나, 마이크만 잡으면 겸손 아닌 겸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런 겸손은 말할 때 마다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겸손을 말했다 하여 못한 스피치가 용서받는 것도 아니고, 자주 반복하다 보면 사람이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다. 불필요한 겸손의 말을 하며 상황을 회피하는 것보다는 연습을 통해 당당하고 개성있는 스피치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준비 못했습니다.
단상앞에서 서기만 하면 떨리는데 예쁘게 봐 주세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