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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 테면 쏘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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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 테면 쏘아 봐라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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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705
ISBN10 89665517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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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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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퇴각하는 새벽
타고 온 호송차 배웅할 새도 없이
꿈결이라도 좋아
증심사 대웅전 부처님과
짧은 작별 인사라도 해야 싶어
당산나무 끼고 돌아 뜀박질로 내달린다
삭발한 탁발승 생각에 웃음 나와도
중머리재 일출은 언제봐도 장관이다
어디에서부터 날아왔을까, 저 기러기 떼
태양의 흑점에서 부화된 게 분명하다
쫓기는 자
무등에 올라 아직도 꿈결인가 살펴보니
태양은 시나브로 중천에 떠올라
언제 다시 올 것인가, 그려보는 한숨 소리
장불재 넘어 규봉암으로 스며든다
끝까지 구속하려는 자들과 싸워
흘린 피 묽어져 꼭두서니 빛 노을로 지기 전에
늦지 말고 오라고 손짓하는 백마 능선
뒤로 하고
퇴각하는 이 오월에 나는
무등 넘어 지리산으로 출정이다
---「출정」중에서

닭이 세 번 우니 날이 밝아오네요

촛불 켜고 염주 알 돌리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는 어머니
전쟁통
오빠들 뒷바라지하느라 문맹아였지만 맹문이는 아니었다고 하시더니
비구니로 출가한 큰딸 따라 시작했던 글공부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이 꿈만 같아
반야바라밀로 살아가고파 나주 공산 본가에 모셔놓고
절 드리며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읊으신다

지혜의 완성이라 하셨습니까
지혜란 열린 마음 빈 마음으로 사는 거란다
이제는 암송만이 아닙니다
낭독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거란다
마하반야바라밀다
마음을 쉬어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아라
아직도 귀에 쟁쟁하나이다

깨우침 위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하겠지요
했더니, 향림사 노스님 입적하시며
깨우쳐 부처가 되려 한다면 금강경을 읽어라
심지어 글을 몰라 읽을 수 없다면 ‘마하반야바라밀다’라도 외워라
그러면 큰 지혜를 이루어 피안에 도달할 것이니라

그 유언 새겨듣듯 오늘도
금강경 읽으시면서 아침을 맞는다
---「금강경」중에서

은장도의 차가움은 가슴 품은
애절함이어서 견디어 냈을까
은색 차가움에 섬뜩 놀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몰라 하는
겁먹은 사슴 눈이 감긴다, 저절로
손목의 차가움과 가리개는 잠시
수갑과 함께 옥죄여 오는 포승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던
예전의 하얀 밧줄이 아니다
수갑은 따르륵, 포승도 또르륵
간격을 줄여 조여오는 기괴한
금속음과 플라스틱 부딪히는 소리는
호송차에서 보이는 풍경과 함께
몸통도 돌아가버리는 구속
흘러내리는 안경도 올릴 수 없다
수갑 채워져 포승줄에 묶여
줄줄이 끌려가는 향연
달콤함은 어디 갔나, 비릿한
비참함을 다시 맛보지 않으려면
그 향연에 맞장구를 치지 말아야,
재판장에 서서 선서를 하면서도
전복의 꿈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혁명가가
수갑과 포승 갑갑했다고
혼자 한탄강을 건너고 있다
---「수갑과 포승」중에서

아무래도 음식 하면 전라도라 하지만
마산시장 어물전에 가면 주눅이 들었다, 엄 부위원장 어머니의 미더덕 젓갈을 전수 받은 깻잎 머리 제수씨의 현란한 칼놀림으로
미더덕 다져 양념한 마산 바다를 먹고, 알쑥해진 취기와 함께 셋이서 친 맞고의 판이란 바다가 바다를 따먹는 꼴이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맛이었다
독방에서 그런 마산 바다를 떠올리다가 어느새 미더덕 껍질을 까고, 현란한 숙수의 칼 놀림을 따라 하며 자문하여 본다
“지금 나가면 제일 먼저 무엇을 먹고 싶나요?”
“미더덕 젓갈 한 숟가락 떠서 쓱싹 밥에 얹어 먹고 싶습니다.”
인터넷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엄 부 식구들만의 레시피, 미더덕 젓갈!
---「미더덕 젓갈―독방 회상 7」중에서

베네치아 서쪽 하늘에
백운산 옥룡사지 천년 동백꽃이 떨어졌습니다
해진 뒤 개밥바라기별이
기어이 그곳까지 가서
붉은빛의 나그네별로 떴습니다
그날 파르티잔 김선우(金善佑) 사령관
샛별을 보며 떠나가신 그대여
베네치아의 죽음보다 더 처연한
저 빛 속으로 녹아들어 가고파
동백꽃 사랑, 불타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해진 뒤 베네치아 해변에
같은 시간 백운산 옥룡사지 하늘에
그래, 처연한 저 별빛과 함께
말러의 교향곡 제3번 제4악장
그래, 처연한 교향곡이 흐릅니다
---「처연(凄然)교향곡」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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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도 신호등을 건넌다. 날마다 세 겹, 네 겹, 수십 겹씩 중첩되는 체제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스며든 권력과 폭력의 야만성을 향하여 양기창의 시는 한없이 차분하지만 통렬하게 저항한다. 수갑과 포승을 차면서도, 이명에 시달리면서도, 독방에서 편지를 읽으면서도 진솔하고 순박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저 순결한 「눈 내리는 풍경」을 보라. 언제나 자신의 말투로 디지털 문명이 강제하는 무한경쟁의 틈새를 허물고 불굴의 인간과 윤리를 그려내는 이 소박한 시 형식을 21세기의 리얼리즘이라 부르자.
- 김형수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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