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 또는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해본 사람은, 그 배신을 겪는 순간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되곤 했다. 아, 나는 다시는 전과 같은 나로 살아갈 수 없겠구나. 내가 모든 몸과 마음을 던져 누군가를 믿게 되는 일은 이제 웬만해선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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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따뜻한 말을 듣지 못한 날에는 텔레비전 광고나 포털사이트에서 마주친 나오는 캠페인 문구를 받아적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살’이라는 두 글자를 검색하면 첫 화면에 나오는 문구 같은 것들.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들. 세상에 남은 가족은 이제 아무도 없고 자신의 힘듦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그런 방식으로나마 스스로를 안아주고 숨 쉬게 해 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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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군요. 잠시만요. 백신은 대답했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흘겨보며, ‘그리기 좋은 무표정’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평소에 그날 본 사람들의 얼굴을 그릴 때는, 원래대로라면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로부터 표정을 거두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 여자는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완성된 무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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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오해할 수도 있지. 저는 사람에게는 자주 머무는 곳의 냄새가 알게 모르게 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면 분 냄새가 나고 카페에서 온종일 일한 사람한테서는 원두 냄새가 나는 것처럼요. 그러면 저한테선 무슨 냄새가 나야 하느냐, 생각해보면,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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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조용할 일인가. 이렇게 조용해도 되는가. 정말로 연고가 없는 것도 슬픈 건 슬픈 거였지만, 연고가 있기는 있으나 누구보다도 가까워야 할 가족들조차도 외면하게 되는 죽음, 그리하여 완성되는 무연고의 죽음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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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얼른 고개를 들어 자신을 알아봐 주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나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듯이 서 있는 아현에게 무슨 말이라도 걸어주는 상상을 했다. 오늘도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나눠 마시는 상상을 했다. 고개를 얼른 들지 않더라도, 단번에 그녀를 알아봐 주지 않더라도, 이내 눈을 똑바로 뜨고는 늦게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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