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시간은 뒷걸음질하고 있었다.
하교 시간이면 골목을 가득 메우던 여학생들의 높은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분식점 대신 ‘마실호프’가 있는 풍경. 휠체어를 탄 할머니가 장생건강원 앞을 지나고, 삼색 등이 돌아가는 이발소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이발사가 그 연배로 보이는 노인의 머리를 깎고 있는 풍경. 현대부동산, 홍어 전문, 순댓국이라는 간판으로 이어지는 골목 풍경….
골목이 늙어버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낡은 건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한번도 어린애를 보지 못했다. 그때는 걸음마를 하는 아기, 세발자전거를 배우는 아이들과 젊고 앳된 엄마들이 골목에 나와 있었는데. 어린애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쇠락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변함없을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변한 모습이 늙어버린 골목이라니. 사람보다도 더 늙어버린 골목…. 간판마다 프랜차이즈라면 낯설 것 같았는데, 차라리 그게 나을 뻔했다.
영희, 지수가 있었더라면 오랜만에 한잔하자며 골목을 돌다가도 마실호프 같은 데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두침침한 건 고사하고 생맥주가 오래돼서 김샌 맛일 것 같아서다. 밥을 먹기 위해서 홍어집이나 닭볶음탕집에 들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영희가 차린 밥상과 지수네 가게에서 오징어, 땅콩에 마시는 맥주와 비교할 수 없다면서 골목을 빠져나왔을 게 분명하다. 영희의 문방구도, 지수의 화장품가게도 사라져 셋이 무릎대고 앉을 곳이 없어졌으니….
문득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내내 영희와 지수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뿔뿔이 흩어진 후 저마다 살기 바빠 놓친 친구들을…. 그것도 현재진행형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상상 속에서 곁에 있는 영희와 지수는 30년 전 모습 그대로다. 나이든 얼굴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다. 여전히 보름달인 영희, 깎은 밤톨 같은 지수. 그 골목에서 그들을 빼놓고는 어떤 추억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추억은 나 혼자가 아닌 셋이서, 거기에 다른 이웃이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독산동 골목 동네에는 사람이 있었다. 이야기가 있었다. 숨길 것도 보탤 것도 꾸밀 것도 없는 사람 사는 이야기. 웃프고도 짠내나는, 우리가 함께했던 이야기들이….
그런데 지금은 혼자서 골목을 서성이고 있다. 연극은 오래 전에 끝났고 관객도 배우도 떠난 지 한참 되었는데, 어쩌다 낯선 무대 위에 올라온 배우처럼 나는 내가 낯설었다.
돌아 나오는 길, 골목대장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게 했던 질문을 거두지 않았다.
“누구요? 왜 왔소?”
혹시라도 우리가 떨어뜨린 청춘 한 조각이 어느 담벼락에 낙서로 남았거나 길바닥에 뒹굴고 있는 건 아닌지 찾고 싶어 왔다고 하면 대답이 되려나. 아니면 고맙고 정겨웠던 얼굴들, 사람 그리운 줄 몰랐던 시절이 있어서 내 청춘은 초라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면 대답이 되려나….
골목을 나서면서 안부 한 줄 슬쩍 흘려놓았다. 영희에게, 지수에게, 함께했던 모든 이들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들도 그러리라 믿어요, 진심으로.”
---「에필로그-거기, 사람이 있었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