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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숨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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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숨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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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26쪽 | 153*224*20mm
ISBN13 9791165120771
ISBN10 1165120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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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부와 스쿠버다이버들이 활개치는 AI시대에 오로지 오리발과 물안경과 테왁에만 의지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확이 저조할 듯싶은 작업 방식은 해산물의 씨를 말리지 않기 위해 예부터 묵언으로 이어온 약속이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도 다음 세대들을 위해 바다를 지켜온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멋진 잠수복과 훌륭한 잠수 장비를 그녀들이 갖출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만큼 건져 올리던 작업량이 생태계를 보존하고 내일을 기약하는 행동으로 지켜졌다. 일천 년 세월 동안 가족 생계를 책임지며 가사를 감당해온 저력이 바로 이런 배려심 때문이었을까. 자라나는 후손을 위해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살아온 순박함이 울컥 가슴을 때렸다. 오랜 세월 그녀들은 할머니의 할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자연 친화적인 방법으로 바다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 날마다 잠수병에 시달리며, 현재를 지키고 아주 먼 미래를 위해 문명의 이기를 무관심하게 참아온 삶이 아름답게 빛나야 하지 않을까.
---「물숨의 약속」중에서

“어머니는 예쁜 치매에 걸리셨어요.” 얼마 전 불혹을 훌쩍 넘긴 할망 딸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의 바늘귀를 꿰어주는 내게 푸념 아닌 넋두리를 쏟아냈다. 잠도 주무시지 않고 앞치마만 만들던 그녀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딸의 얼굴을 깜박깜박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손주손녀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바다에 묻힌 남편 얼굴과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과 이야기 나누는 엄마를 발견하고 놀란 딸은 병원을 찾아갔다. 자식조차 ‘예쁜 치매’라고 말하던 할망의 증세는 바느질거리만 잡으면 꼼짝 않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바느질에 집중하느라 밖에 나가는 일도, 길 잃을 일도, 주방에서 사고칠 일도 없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은 볼 일이 있거나 물질을 나갈 때면 바느질감을 잔뜩 안겨주고 나간다고 했다. 할망은 딸이 들어올 때까지 힘든 줄 모른 채 앞치마만 만들었다. 눈이 침침해 보이지 않아도, 귀가 어두워 들리지 않아도, 손가락이 닳아 있어도, 앞치마 만드는 일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제주 할망 손으로 깁다」중에서

순비기나무란 독특한 이름은 ‘숨비소리’에서 붙여졌다. 숨비소리는 물질하던 해녀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허파에 압축됐던 공기를 입 밖으로 뱉어낼 때 나오는 깊은 숨소리 아니던가. 제주 바당을 따라 걷다보면, 순비기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메마른 모래밭에서 소금기 섞인 바람과 거친 태풍을 맞으며 꿋꿋하게 뿌리내리고 번식하는 모습이 해녀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닮았다. 그래서일까. ‘그리움’이란 꽃말을 지닌 순비기나무는 ‘숨베기낭’, ‘숨비기낭’이라 불리며 해녀들에게 고마운 식물로 알려져왔다. 특별한 약재를 구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민간요법이야말로 요긴한 비상약품이 아니었을까. “야가 두통 치료는 즉방인데, 그리움은 치료해주지 않아야.” 칠순이 된 그녀 입에서 ‘그리움’이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순간, 언뜻언뜻 알아챘던 그녀의 과거가 떠올라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조심조심 장단 맞춰주고,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어주며, 한풀이 같은 하소연을 들었다.
---「그리움을 버리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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