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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1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595쪽 | 738g | 153*224*35mm
ISBN13 9788984371118
ISBN10 8984371114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약간 있으나, 대체적으로 손상 없는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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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하거나 이상한 내용?
아니야. 그냥 지난 과거의 일일 뿐이야. 이미 오래전 과거. 하지만 그 과거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현재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과거까지.
‘지금은 아니’가 ‘전혀’가 되기란 얼마나 순식간인가.
그러나 이미 소포가 도착했고, 오랫동안 잊으려 애쓴 일이 다시 현실로 밀어닥치고 있다.
과거가 더 이상 흐릿한 그림자이지 않을 때는?
그 과거와 더불어 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삶이 순탄할 수만은 없다. 메인 주 뒷길에 있는 한적한 별장에서 조용히 숨어 지낼 때 법원 송달리가 별안간 현관문을 노크할 수도 있다. 혹은 대서양 건너에서 소포가 와 25년 전 베를린 모퉁이의 크렌즈베르크라는 카페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스프링 제본의 노트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빨간색 파카 만년필을 오른손에 쥐고 글씨를 휘갈겨 쓰는 여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독일어로 말하는 목소리.
“글자가 참 많네요.”
고개를 든다. 그 여자가 보인다. 페트라 두스만. 그 순간부터 세상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것은 내 대답 때문이다.
“네, 글자가 참 많죠. 하지만 이 글자들 모두 쓰레기입니다.”
내가 그렇게 자기비하를 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다가왔을까? 아니, 여자가 정말 다가오기는 했던가?

여자가 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우리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며 나는 직감했다. 여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페트라는 내 손을 놓고 다시 웰만 지국장을 보며 말했다.
“혹시 원고에 이상이 있으면…….”
“그럴 리가요? 아, 토마스 씨와 조만간 같이 일하게 될 겁니다.”
지국장의 말에 페트라가 희미하게 웃었던가? 아니, 얼른 고개를 끄덕여 그 웃음을 가렸던가?
내가 말했다.
“함께 일하게 되기를 고대합니다.”
페트라는 나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 고마워요.”
페트라가 나가고 문이 닫힐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알던 삶이 방금 전에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는 키스했고, 또다시 욕망에 휩싸여 한순간에 옷을 다 벗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어쩔 수 없이 변한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애틋한 면이 사라지고 일상처럼 시들해진다고.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그라지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새로운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오직 그 순간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감정이야. 이 모든 게 지금 내 팔에 안겨 있는 이 특별한 여자 덕분이야.’
페트라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나와 나란히 누운 그녀가 말했다.
“사흘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 이제야 깨달았어.”
“그게 뭔데?”
“세상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상처는 그대로야. 토마스, 당신을 향한 내 사랑, 당신이 내게 준 사랑, 우리가 함께 하는 사랑, 그 사랑이 내 삶을 바꾼 건 사실이야. 나는 다시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지. 하지만 자기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에서 요한만이 유일한 행복이었어. 요한은 이제 포기해야 한다고, 다시 볼 수 없다고,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며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소용없었지. 나는 지금도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어디에나 요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던 거야.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나를 멀리하는 게 좋다고. 내 아들 요한이 저 장벽 너머에서 비밀경찰의 손에서 자라고 있는 한 나는 늘 상처를 입은 사람일 테니까. 늘 슬픈 사람일 테니까. 나 같은 사람과 산다는 건 불행일 테니까.
토마스 지금이라도 나를 멀리 떠나. 당신은 이 일에 휘말리지 마. 복잡하고 슬픈 내 인생에 휘말리지 마.”

나를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첫 날에는 지쳐서 쓰러졌지만 그 다음 며칠 동안은 잘 수도, 먹을 수도, 스탠의 아파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스탠에게 밤새 그 일을 다 이야기하고 나서도 슬픔이나 죄책감이 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절망은 더욱 깊어졌다.
내가 스스로를 망쳤다는 알스테어의 말은 정확했다. 마지막 순간들, 페트라가 해명할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졌다. 페트라의 말을 들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페트라가 동독 정보국을 위해 일한 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면 어차피 함께 미국으로 오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마지막 순간에 페트라가 드러내 보인 절망적인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더없이 끔찍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그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가? 세상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해지지 않던가? 커다란 충격으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사라진다. 슬픔이 시작되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게 거대한 침묵이 찾아온다.
내 슬픔은 이미 26년 전에 시작됐다.
그리고 이제…….
내 머릿속에는 이 말만이 맴돌았다.
‘페트라. 나의 페트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그렇게 꼼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페트라. 나의 페트라.’
이럴 수는 없어.
그러나 더없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보냅니다.’
페트라는 내가 노트를 읽기 원했다. 그래, 그렇다면 읽어야지.

진작 당신에게 연락하는 게 옳았겠지. 나도 알아. 나도 무척 이나 연락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예전에 당신을 속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지. 내가 용서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정말 이상하지? 우리 괴로움, 분노, 꿈을 모두 움켜쥔 채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는 것을 붙잡지도 못하다니…….
당신을 사랑한 것.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은 것. 나에게는 정말이지 더할 수 없는 선물이었어. 나는 당신의 짝이었고, 당신은 내 짝이었지. 다가온 순간, 지나간 순간, 나는 지금도 우리를 생각하면서 울어.
사랑해. 그때도 지금도 영원히.
당신의 페트라.

길이 있다. 새로운 날이 있다. 눈앞에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깨달음을 줄 심오한 무엇을 바라는 희망. 다시는 못 느낄 생각. 인생의 제2장으로 들어설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를 필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 인간 실존의 중심에 있는 고독.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 타인과 연결될 때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순간.
우리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주 짧은 찰나라도 순간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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