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을 보는 게 꿈이었다
볕은 그 꿈을 알아봤다

찬바람 물이 올라
죄다 풀다 터지다

부신 눈
살며시 뜨고

봉곳해진
봉오리
--- 「납매臘梅」 중에서


달빛 흰가 매화 흰가 견주고 있는갑다

동지에 매화 피자 휘영청 밝은 달빛

비포리 바닷가 마을 나래 접은 휘파람새

사위어가는 뼈마디 삭신은 쑤시지만

바람에 덧난 상처 추위를 발라내어

해조음 찰싹거리며 오도송을 하는갑다
--- 「동지월매冬至月梅」 중에서


어제는 비가 와서 비와 비 비켜서서

바닷가 갯바람은 발끝에 힘을 주고

잘 익은 섣달 보름달 언가슴 풀어내듯

벼리고 벼린 추위 근골을 다잡으며

백 년 전 염장 기억 파르라니 우려내어

경상도 꿈 많은 사내 동지매冬至梅를 구워낸다
--- 「비포리 매화」 중에서


메말라 여윈 가지 단아한 매무새는
동지에 눈을 뜨고 우수에 몸을 풀어
남명매 사백오십 년 성성자를 울린다

찬바람 불어오면 뿌리째 물을 길어
민얼굴 빈손으로 고요를 깨뜨리며
전서구 안부 전하듯 사무쳐 붉은 마음

법계사 범종 소리 산천재를 갈마들어
아침이 오기 전에 등 시린 문을 열고
개결한 설매雪梅 봉오리 뼈저린 소訴를 쓴다
--- 「남명매南冥梅」 중에서


백두대간 바람 따라 살 시린 물줄기는
전율하듯 절규하듯 온몸을 헤집으며
사임당 젖은 눈매에 꽃망울 틔우더라

봄 마중 햇살 받아 고요도 몸을 풀고
오죽헌 너른 마당 먹물을 갈아내어
매창의 매운 붓끝은 묵매도를 그리더라

득음을 기다리는 육백 년 긴 세월은
버성긴 별을 모아 주광등 내어 걸고
율곡은 하얀 목덜미 구곡담을 읊조린다
--- 「율곡매」 중에서


매화 그늘 아래 장독이 줄을 섰다
안거하는 스님처럼 휴거休居의 방에 앉아
아득히 굽은 열정은 둥근 어깨 다독인다

몸 안에 피는 팡이 매향이 감미로워
거친 삶 마름하듯 말갛게 결이 삭아
대 이은 아내의 손맛 다소곳이 익어간다
--- 「매화장梅花醬」 중에서


비를 부르느라 연신 손을 비벼댔다

꽃뱀이 지나갔다 풀숲이 흔들렸다

새순은 촉촉한 눈매 수련처럼 수런댄다

바람나 벙근 꽃잎 난분분 휘날리고

물오른 자작나무 거자수를 길어내듯

곡우 물 곡우사리에 씻나락*도 몸을 튼다

* 씻나락: ‘볍씨’의 경상도 토속어.
--- 「곡우 무렵」 중에서


소나무도 나이 들면 풍류가 느는 갑다
제 흥에 내가 취해 시름을 잊었노라
아니리 장단을 치는 춤사위도 여유롭다

눈보라 이긴 가지 해탈의 바람 모아

그대 그리워
소곤대는 목소리

아려서 서러운 수관樹冠 녹음을 드리웠다
--- 「팔군무송八群舞松」 중에서


어린 날 외가 마을 황톳빛 언덕배기
숨 고른 능선 따라 노오란 꽃이 폈다
마음에 마음을 더해 꽃 잔치 벌어졌다

더러는 해를 보며 머리를 세우고
더러는 무거워라 고개 절로 숙이고
성긴 듯 다습한 바람 구름이 머무르고

비우면 채워진다
채우면서 더해진다

절절한 가슴앓이 그리움을 몰고 와서
기다려 타는 목마름 해바라기 꽃이 된다

“어제는 비가 와서 비와 비 비켜서서//바닷가 갯바람은 발끝에 힘을 주고//잘 익은 섣달 보름달 언가슴 풀어내듯//벼리고 벼린 추위 근골을 다잡으며//백 년 전 염장 기억 파르라니 우려내어//경상도 꿈 많은 사내 동지매冬至梅를 구워낸다//(「비포리 매화」 전문)”<br/><br/><br/> 시조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한 사내가 정성껏 피워 올리는 ‘동지매冬至梅’를 노래한다. 비가 내리고 비가 서로 비켜설 때 “바닷가 갯바람”과 “벼리고 벼린 추위”를 넘어 ‘매화’는 “백 년 전 염장 기억 파르라니 우려내어” 그야말로 “비포리 바닷가 마을 나래 접은 휘파람새”(「동지월매冬至月梅」)처럼 경상도 꿈 많은 사내의 신산하고도 아름다운 내면의 시간을 암유(暗喩)한다. “경상도 꿈 많은 사내”로서의 ‘시인 김복근’의 모습이, 잠깐, 순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br/><br/> 이러한 ‘매화’를 향한 다양하고도 집중적인 형상적 성취는 우리 시조가 일군 귀중한 결실 중 하나일 것이다. 더러 심미적 표상으로, 더러 역사적 의지의 충일함으로, 더러 내면적 깊이의 은유적 상관물로 번져간 이 형상으로 하여 이번 시조집은 ‘매화’의 눈부신 모습과 향기로 자욱하다. 이때 시인은 대상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정 양식의 속성을 적극 견지하면서 대상 관찰의 오랜 시간과 그에 대한 독자적 해석안(眼)을 동시에 보여준다. 따라서 김복근 시인은 세계와 자아 사이의 균열을 메워가면서 삶의 심미적 완성을 믿는 고전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br/><br/><br/>김복근 시조 미학을 이루는 확연한 구심이 견결하고 반듯한 삶의 태도에 있다면, 확연한 원심은 사라져간 기억들을 향한 애잔한 그리움의 에너지로 충일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시조가 정형적 한계와 가능성을 감안하면서 절제와 균형의 미학을 벼리는 힘에 의해 다채로운 미학적 변용을 이루어가는 흐름에 김복근 시조는 매우 중요하고 또 탁월한 표지를 세워놓는데, 그 근원적 힘이 바로 삶과 역사에 대한 남다른 기억에 있었던 셈이다.<br/><br/>김복근의 이번 시조집은 미학적으로는 스스로의 정점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경험적인 구체성으로 회귀해 들어오기도 한다. 그 점에서 그는 스스로는 낮추면서 삶의 아름다움과 비극성에 대한 형상화에는 높은 안목을 가진 시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아호(雅號) 수하(水下)는 ‘물아래’를 뜻하기도 하고 흐르는 내나 강의 하류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시인의 목소리는 낮고 깊으며 또한 한없이 흘러갈 것이다.<br/><br/> 시를 포함한 모든 언어예술은 한 시대의 속성을 증언하려 한다. 인과론적 설명으로 세계가 명료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시인들은 우리 시대의 복합성과 중층성과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다양성의 풍요로움을 힘껏 그려 보이려고 한다. 주체의 정체성을 신념의 논리에서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타자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자신의 빈터를 채우는 작법을 지속적으로 견지해가려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아(彼我)의 확연한 구별이 아니라 양자 간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끊임없이 착근시켜가고 있다. 김복근 시조는 이러한 간단없는 싸움과 견딤을 통해, 상품 미학과 문화 자본의 전횡에 직면한 시조가 폐허를 건너는 장면을 절정의 미학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존재의 시원과 역사를 탐색하는 김복근 시조의 위의(威儀)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의 낮고 깊으며 또한 한없이 흘러가는 목소리가, 더욱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경험과 예지를 담은 다음 세계로 불원간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임을 강렬하게 예감하게 된다.

우리 시조시단의 중진인 김복근金卜根 시인의 신작 시조집 『비포리 매화』는 고전적 통찰과 완미한 형식 미학을 갖추면서 그 안에 견결하고 깊은 마음의 상태를 새겨간 현대시조의 심미적 화첩으로 모자람이 없다. 시인은 “시조가 중심이 되는/시대”(「시조의 말」)를 꿈꾸면서, 이번 시조집을 통해 가장 고매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차원을 사유해간다. 나아가 존재의 시원始原과 역사를 함께 결속하면서 자신만의 다이내믹한 언어를 정성스레 갈무리해간다. 정형 양식 안에서 이러한 역동성과 다양성이 출현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그것은 어느새 김복근 시인만의 미학적 특성으로 깊이 새겨지고 있다. 이제 그 ‘비포리 매화’가 역동적으로 피워 올리는 시학적 향기에 한껏 가닿도록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