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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한국
중고도서

두 개의 한국

: 전직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바라본 한국 현대사 비록

돈 오버더퍼 저 / 이종길 역 | 길산 | 2002년 08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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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659쪽 | 880g | 148*210*35mm
ISBN13 9788995201244
ISBN10 899520124X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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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 이종길
한국외국어대학 무역학과 졸업. 역서에 『나폴레옹 전기』『성서이야기』『베토벤 평전』 『상형문자의 비밀』『두개의 한국』등이 있다.
저자 : 돈 오버더퍼
美國 애틀랜타주 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포병장교로 6.25(한국전)를 참전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그는 최근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미 국방부의 자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위촉된 바 있다. 워싱턴포스트지에서의 25년을 포함한 40년간의 언론 생활은 그에게 많은 언론 수상과 더불어 공익봉사에 대한 프린스턴大의 우드로 윌슨 常을 수상케했다. 현재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존스 홉킨스 大 니체 고등국제문제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 활동중에 있다. 저서로는 『구정공습(Tet)』『냉전에서 새로운 시대로(The Turn)』가 있으며 그의 세번째 저서인 본서는 한반도와 평생을 같이해온 저자의 통찰력으로 근대 한국사를 거울에 비춰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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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 도착한 카터와 여섯 명의 보좌관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朴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朴대통령은 회담 전 미국 측 인사들로부터, 철군 문제는 매우 미묘한 사안이므로 자칫 말을 꺼내어 간신히 구슬려 놓은 카터를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해줄 것을 부탁 받았다. 그러나 朴대통령은 그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북한의 전력 증강에 비추어 볼 때 주한미군 철수가 파멸을 자초하는 실수임을 증명하는 전략적 근거와 한반도 내 상황을 설명한 장문의 서한을 자신의 수려한 필체로 직접 작성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절의 외교적 수사도 없이 그것을 카터의 앞에 내놓았다.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전문가 니콜라스 플랫(Nicholas Platt)은 카터의 턱 근육이 조용히 씰룩거리는 것을 보았다. 카터가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면 으레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이와 동시에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朴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한마디씩 끝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쳐서 탁탁 소리를 냈다. 이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朴대통령의 버릇이었다. 밴스는 카터의 차가운 분기(憤氣)로 회의실 전체가 냉랭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朴대통령이 무려 45분 동안 자신의 입장을 장황하게 전달하는 동안 카터는 밴스와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전달했다. “만일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말겠소.”라는 내용이었다. 카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반론을 제기하는 대신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朴대통령과 함께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 계속 대화를 나눴다. 밀폐된 장소에서 카터는 남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한 뒤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훨씬 부강한 대한민국이 군사적으로 북한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훗날 홀브룩 국무부 차관보는 “당시 한-미 양국 정상 사이의 대면은 동맹국 정상간의 회담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평했다.

朴대통령과의 대담을 마친 카터는 밴스 국방장관,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보좌관, 글라이스틴 대사를 대동하고 미국 대사관저로 향했다. 리무진 안에서 카터는 분기탱천한 어조로 朴대통령을 비난하면서 어떠한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라도 주한미군 철수를 강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보좌관들이 ‘철군론’ 무산을 위해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질타했다. 당시 카터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었던 글라이스틴은 카터의 노골적인 불만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철수 강행이 미칠 엄청난 파장과 철군 취소 시 얻게 될 이점들을 강한 어조로 조목조목 설명했다.

노기등등한 대통령은 글라이스틴의 얼굴 앞에 삿대질을 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글라이스틴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잠시 후 밴스와 브라운이 논쟁에 끼어들어 글라이스틴을 두둔했고 브레진스키는 아무 말 없이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카터 행정부의 최고위급 정책결정권자들이 대통령 전용차를 미국 대사관저 현관 앞에 세워 놓고 약 10여 분 이상 열띤 논쟁을 벌인 것이다. 다른 수행원들이 타고 있던 차량은 영문도 모른 채 대통령 전용 리무진 뒤로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었다. 두 번째 차량에 타고 있었던 홀브룩과 플랫은 앞차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논쟁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모습은 볼 수가 있었다. 홀브룩은 플랫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문제에 관한 진지한 회의가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나 보군요.
--- pp. 169 ~ 17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총수인 김일성은 타이타닉 호가 차가운 북대서양 바닥에 가라앉았던 1912년 4월 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실한 장로교 장로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는 기독교 학교 출신이었다.
김일성이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은 8년에 불과하며 한약방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 2년은 만주에 있는 중국인 학교에 다녔다. 17세 때 혁명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그는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김일성은 잠시 옥고를 치른 후 1930년대 초 항일 유격대에 합류했다. 당시 일본은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한 후 만주를 침략해 점령한 상태였다. 한인 유격대는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군대 산하에 소속돼 있었고 그 지휘를 받았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훗날 북한의 선동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백전백승의 눈부신 위업은 아니었지만 일본군이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만큼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1941년 김일성이 이끄는 부대는 다른 중국인 유격대와 함께 일본군에 쫓겨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군 훈련소에 이르렀고 김일성은 그곳에서 4년을 지냈다. 그 동안에 김일성은 빨치산 동료대원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장남이 그의 후계자가 된 김정일(金正日)이다.
--- p. 43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된 뒤 다수의 군인들이 김대중의 자택에 난입해 가택수색 후 그를 연행했다. 이 밖에도 그의 비서, 경호원 그리고 가깝게 지내는 정치인 중에서 최소한 9명 이상이 함께 체포했다. 연행 몇 시간 전부터 이미 세간에는 김대중이 학생시위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었고, 글라이스틴은 대통령 비서실장 최광수에게 정국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을 체포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은 조치’이며, 특히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볏단에 불을 들고 뛰어가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예상은 적중했다.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곳곳에 군대가 진입해 삼엄한 경비를 서고 특히 김대중이 체포되자 그의 정치적 배경인 광주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불붙은 듯 일어났다. 그날 일요일 아침 오전에는 일찍부터 학생시위대와 전투경찰 사이에 충돌이 빚어졌다. 당시 이러한 충돌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했던 터였다. 그 순간 갑자기 검은색 베레모를 착용한 특전사부대가 광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 자원봉사자로 근무하던 중 현장을 목격했던 팀 원버그(Tim Warnberg)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포에 질린 군중과 함께 내달렸다. 나는 또 다른 평화봉사단원 한 명을 포함한 약 열 다섯 명의 사람들과 어느 작은 가게로 피신했다. 한 군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곤봉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침내 그는 우리 평화봉사단원들 앞에 다가와 섰다. 그는 잠시 멈칫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밖으로 뛰어 나가 버렸다. 우리가 상황을 살펴보려고 골목으로 나갔을 때는 군대가 대로 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기저기에 부상당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부상자의 대다수는 머리나 팔, 다리를 심하게 구타당한 상태였다...한 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는데 이마가 깊이 패여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공수부대원이 난입해 머리를 곤봉으로 세게 내려친 후 물러났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비록 그 중 일부는 격렬하게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이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공수대원들로부터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이다.

광주에서 15년 가까이 살았던 선교사 마사 헌트리(Martha Huntley)는 자기가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설명했다.

30세 정도 된 사업가로 나도 잘 알고 있던 한 남자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타고 가던) 버스에서 끌어내려진 다음 군인들의 발길질에 얼굴을 심하게 맞아 결국 한 쪽 눈을 실명 하고 말았다. 갓 서른을 넘은 또 한 여성은 아이 둘을 데리고 주일학교에 가던 중 구타 를 당해서 보도에 의식을 잃고 버려졌다. 그녀는 머리부분에 봉합수술을 받았고 후유증 으로 몇 달 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 일요일 오후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가담해 군인들과 싸웠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민에 대한 공수부대의 무차별 공격이 3일간 이어졌고 이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격렬한 저항도 점차 확대돼 갔다. 5월 21일 아침 광주시민들은 군용차량을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해 권총, 소총과 함께 수천 발의 탄약을 손에 넣었다. 특수부대 병력과 격전을 치른 후 일단의 학생들은 한 병원의 옥상 위에 기관총을 설치했다. 공수부대를 동원한 잔혹한 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군대는 광주 시 외곽으로 후퇴해 광주市 주변을 봉쇄했다.
--- pp. 201 ~ 203
전국 1백 4개의 대학에서 1백 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앞장서서 시위에 참여했고 시민과 근로자들도 시위대열에 가세했다. 86년 5월 필자는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인천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적이 있었다.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야당측의 집회를 1시간 앞두고 학생 시위대와 경찰이 먼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을 빚었던 것이다. 먼저 펑하고 최루탄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학생들이 화염병, 깨진 벽돌, 돌멩이 따위를 던지며 서슴없이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학생들과 같은 아니 또래의 전투경찰들이 촘촘하게 대열을 짜고 밀고 들어오자 학생들은 속절없이 뒤로 흩어지면서 후퇴했다. 경찰이 커다란 탱크처럼 생긴 차량을 동원해 계속해서 최루 가스를 발사했고 사방은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자욱해졌다. 이 가스는 최루 가스보다 훨씬 지독한 페퍼 가스였다.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시위진압 작전은 완료됐다. 필자는 이 놀라운 광경을 넋을 놓고 지켜보다 갑자기 눈과 목이 불에 덴 듯이 따가워져서 인천 시청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는 야당 지도자들이 젖은 수건으로 연신 따가운 눈을 눌러대며 낙담하고 있었다.

다음날 필자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 도피중인 학생운동 지도자 세 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나이가 제일 많은 28세의 한 학생은 “학생들은 야당이 전두환 대통령의 파시스트 정권과 타협을 모색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집회를 고의로 무산시켰다”고 말했다. 이들은 극렬한 반정부, 반미주의자들이었고 미국은 전두환 정권 수립을 용인한 책임이 있으며 냉전 목적을 위해 남한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미 제국주의와 전두환의 파시즘 정권이 손을 잡은 단적인 예”가 80년의 광주학살이라고 말했다.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논리라 생각했지만 짐작과는 달리 이들의 주장이 일반 대학생들의 의견이라는 것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됐다. 엘리트 집단이라 불리는 서울대학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9%가 미국을 신식민주의 국가나 제국주의 국가라고 규정했으며 80%가 한 · 미 관계에 불만을 표시했다. (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인가운데서는 한 · 미 관계에 불만을 표시한 응답자는 9%였다.)
--- pp. 258 ~ 259
동창회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기업가인 하종욱(河種旭)은 당시 돈과 정치에 관련된 문제로 몹시 고민하던 참이었다. 동창생들이 악단의 연주 속에 잔을 주고받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한 동창생을 한 명 발견했다. 바로 2년 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박계동(朴啓東)이었다. 그는 박 의원을 데리고 시끄러운 연회장을 벗어나 호텔 로비로 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문제의 발단은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한 93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친과 함께 수출입 물품 운송 중개업을 하던 하종욱은 거래은행인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으로부터 이상한 요청을 받았다. 그의 부친 계좌에 다른 사람 돈 1백10억 원을 입금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지점장이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하종욱은 평소 은행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해서 이를 허락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하종욱은 그 일에 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이 국정 개혁의 일환으로 ‘금융실명제’ 도입을 선언했다. 가명 또는 차명 계좌를 악용해 불법 정치자금이나 다른 수상쩍은 거래를 위한 돈을 은닉하거나 세탁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이어서 96년 1월부터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시행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하종욱은 큰 곤경에 빠졌다. 당시 그는 부친의 계좌에 입금된 돈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금에 부과될 세금 약 7억 원 가량을 조만간 부친이 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그렇게 큰 액수의 세금을 낼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설사 盧대통령이 세금을 내라고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소기업 사장이 그런 거액의 자금을 모은 것을 수상히 여긴 세무 당국이 세무조사라도 실시하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종욱은 자신의 부친 외에 다른 2명의 같은 은행 계좌에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자금이 은닉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급해진 그는 세금이 부과되기 전에 힘있는 정계 인사를 통해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던 동창생 박계동에게 부탁했다.
--- p. 546
김정일의 호화판 생활과 과음, 여성편력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없을 정도이다. 그는 66년 김일성 대학 동창과 결혼했다가 1971년 이혼한 후 역시 김일성 대학 출신으로 노동당 본부에서 타자수(打字手)로 근무하던 현재의 아내와 1973년 재혼했다. 또한 그는 70년대 초반에 유명 여배우와 오랫동안 내연관계에 있었던 일 등을 포함해서 여자관계가 복잡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여배우는 결국 모스크바에 있는 별장으로 보내졌다.

김정일의 활동상이 가장 폭넓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최은희 · 신상옥 납치사건이었다. 남한의 일류 여배우인 최은희와 1급 영화감독이자 최은희의 전 남편인 신상옥은 김정일의 지시로 1978년 홍콩에서 각각 북한으로 납치됐다. 김정일은 그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낙후된 영화 산업 진흥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납치를 명령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정일은 그들에게 “이 두 사람이 필요하니 이리로 데려오라’고 한 마디 던졌더니 내 밑에 있는 동무들이 그대로 실행에 옮겼더군요”라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당시 김정일의 발언들은 나중에 신상옥 부부가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에 의해 폭로됐다.
--- p. 507
8.15 저격사건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심지어 朴대통령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사랑 받았던 陸여사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育여사는 朴대통령의 두 번째(1940년대 말경에 관계했던 내연의 처까지 합한다면 세 번째) 부인이다. 그녀는 지체 높은 집안 출신으로 우아하고 매력적인 용모에 자기표현이 명확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남편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소중한 미덕이었다. 陸여사는 남편이 정치적으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고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고 朴대통령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심어주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朴대통령의 생활은 이전보다 더 고립되는 듯 했고 사람들을 멀리 한 채 내면으로만 몰입했다.
그녀가 죽은 뒤 두 달이 겨우 지났지 않았을 무렵, 朴대통령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느새 10월의 마지막 주다!
저무는 가을에는 외로움만이 깃들어 있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국화는 만발했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원에는 낙엽이 하나, 둘 지는데
나는 점점 우울해질 뿐이다.

대통령 저격 미수 및 육 여사 살해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문세광은 74년 12월 20일 서울의 한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75년 8월 15일, 아내의 죽음 1주기를 맞아 朴대통령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해 이날 9시 45분경 아래층 집무실에
오렌지색 한복차림으로 내려온 당신과 같이 식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당신이 청와대를 생전에 마지막 하직하는 길이었다.
작년의 오늘은 나의 일생 중 가장 긴 하루요 가장 괴롭고도 슬픈 하루였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에 빠진 그 날이었다.
모든 것이 다 귀찮고 나의 심신에서 모든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게 한 그 날이었다. 그 로부터 1년이란 세월이 벌써 흘렀다.
지난 1년 남모르게 수없이 많이 혼자 울기도 했다.
--- pp. 97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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