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확장이라는 오디세이에서 우리는 인류 존재의 궤적에 새겨진 크고 작은 변화의 흔적과 그 누적적 효과가 어떻게 변화를 넘어 변혁으로 이어져 왔는지를 목격해 왔다. 불의 발견으로부터 인쇄기의 발명, 그리고 만유인력과 전자기유도 법칙에 이르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오늘날의 지구 문명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훨씬 더 정교해진 현대 문명의 설계도 안에 손톱만큼이나 작지만 놀랍도록 복잡한 구조물을 담고 있는 실리콘 조각의 이야기를 우리는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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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서사는 이제 컴퓨터를 넘어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시대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무대 위에 새로운 등장인물과 새로운 기술들이 주인공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AI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진다. 다만 이 책에서는 이러한 고차원적 질문보다는 현재의 AI 기술과 관련 산업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핵심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정리해 앞으로 과연 누가 AI 혁명을 주도해 나갈지를 진단해보는 데 집중할 것이다. 끝으로 반도체와 관련한 일반의 오해, 그리고 애널리스트로서 경제적 관점에서 반도체 산업을 보는 인사이트, 그리고 투자자들을 위한 투자 참고 지표들도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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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오디세이』는 어떤 주장을 하거나 결론을 내려고 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컴퓨터와 반도체라는 기술의 코어를 분석해온 애널리스트의 시각에서 테크놀로지의 점진적인 발전이 누적되어 어느 순간 문턱을 넘어서며 나타나는 기술적 도약의 흐름을 다각도에서 연결하고 해석해본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지정학과 기술 패권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는 반도체를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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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복잡하게 상호 연결된 인류의 네트워크에서 컴퓨터와 반도체보다 더 깊은 영향을 미치는 혁신은 별로 없을 것이다. 뻔하게만 보였던 자동 연주 장치가 덧셈과 뺄셈을 도와주는 계산기계를 거쳐 현대의 인공지능으로 진화하면서
펼쳐지는 기술의 파노라마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시대를 관통하는 기술적 경이로움과 혁신적인 여정은 바로 우리 인류의 독창성과 호기심, 그리고 변화에 대한 매혹적인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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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러브레이스는 “아날로그적인 자연 현상이 수치화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숫자의 기계적인 조작을 통해 음악을 작곡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또한 “하지만 그게 정말로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라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즉, 2023년의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AI 시대의 출현을 그녀는 이미 200년 전에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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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링 머신 뒤에 숨겨져 있는 그의 핵심적인 생각은 적절한 명령어 집합이 주어진다면 컴퓨터로 생각의 프로세스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충분한 시간과 메모리가 주어진다면 튜링 머신이 모든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컴퓨팅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튜링 머신의 개념은 알고리즘, 프로그래밍 언어 및 기타 컴퓨터 과학의 기본 개념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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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노이만은 다양한 학문과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폰 노이만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현재와 같은 CPU, 메모리, 프로그램 구조로 이루어진 범용 컴퓨터의 기본 아키텍쳐를 확립했다는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 연구진 중 거의 유일하게 외부로 자유롭게 외출이 가능했던 폰 노이만은 당시 〈컴퓨터의 이론 설계 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CPU, 메모리, 프로그램의 독립된 구조를 갖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에드박을 실제로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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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원 박사는 모스펫을 최초로 개발한 공로로 아탈라 박사와 함께 1975년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수여하는 ‘스튜어트 밸런타인 메달’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미국 상무부 산하 특허청에서 공인하는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기도 했다. 1988년 벨 연구소를 퇴임한 강대원 박사는 일본 NEC가 미국에 세운 연구소의 소장으로 부임해 말년의 연구를 이어갔지만, 안타깝게도 1992년 61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별세한다. 하지만 강 박사가 발명한 두 가지 소자인 모스펫과 플로팅게이트는 명실공히 현대 IC 혁명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강대원이라는 이름은 반도체 업계의 또 다른 전설로 기억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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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의 기본적인 발전 방향은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단일 칩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더 작은 크기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으로 알려진 이 트렌드는 수십 년간 컴퓨팅 성능의 기하급수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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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기술이 진화되어가는 반도체라는 세계에서 지성과 선견지명을 가진 영웅과 기업의 상호작용은 특별함 그 자체이다. 이 장에서는 반도체 지형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선구자, 혁신가, 개척자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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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공식적으로 반도체 기업이 아니다. 반도체 매출도 집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가장 중요한 반도체 업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조사 기관 가트너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애플은 총 671억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구매해 4년 연속으로 삼성전자를 누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반도체를 구매한 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애플과 삼성전자 다음으로는 레노보, 델, BBK 등이 자리하고 있다.
--- p.184
TSMC는 자체 브랜드의 제품은 전혀 만들지 않는다. TSMC는 애플, 퀄컴, 엔비디아, AMD 등의 제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제조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대만은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대신 이들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고 공생하는 것이 대만이 추구해야 할 방향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TSMC는 칩을 대신 만들어주고, ASE는 이를 대신 패키징해주며, 폭스콘은 아이폰을 대신 제조한다. 이러한 공생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특히 팬데믹 이후로는 상당히 성공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 p.222
미국에서 돌아온 이병철 회장은 즉각 반도체 사업에 대한 기획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7개월 뒤 100장이 넘는 기획안을 받아든 이병철 회장은 1982년 말부터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 머무르며 신사업에 대한 구상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을 넘어선 비책이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급부상으로 미국 내에서 번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반감이 향후 어떤 지정학적 변수로 작용할 것인가, 그리고 삼성이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고차원 방정식을 풀기 위한 장고에 들어간 것이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병철에겐 이 말이 통하지 않았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장기적이면서도 구체적 구상을 마친 그는 1983년 2월 8일 사돈인 중앙일보 홍진기(1917~1986)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삼성의 VLSI 반도체 사업 진출에 관한 계획을 공식화한다. 20세기 한국 경제사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도쿄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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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은 세계를 변화시킨 수많은 혁신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반도체는 전자부품의 한 부분일 뿐이다. 겉으로 보이는 반도체 산업은 자동차나 에너지 등의 산업에 비해 시장 규모가 현저하게 작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라는 사실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조망하는 관점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면 여기저기 구멍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취약하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어쩌면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일지도 모른다.
--- p.378
반도체의 수직적·수평적 통합을 강화하는 M&A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엔비디아가 반도체를 넘어 데이터센터 네트워킹 기술을 강화하기 위해 멜라녹스를 인수한 것은 지금 와서 보니 신의 한 수가 되어 있었다. 이 외에 비슷한 분야의 경쟁 업체를 인수함으로써 시장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M&A도 진행되고 있다. 수평적 확장의 예로는 마이크로칩의 아트멜과 마이크로세미 인수, 아날로그 디바이스의 리니어테크놀로지와 맥심 인수, 르네사스의 다이얼로그 인수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수직적·수평적 통합은 반도체 산업이 AI의 발전과 응용 분야 확대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된다.
--- p.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