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와 전화가 우리 정서에 미친 영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장치들이 발명되기 전의 적어도 1,000년간은 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아주 열악했다. …… 버지니아에서 조지 워싱턴이 사망했을 때 그 소식이 뉴욕까지 닿는 데는 일주일이 걸린 반면, 댈러스에서 존 F.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국민의 70퍼센트는 30분 만에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5)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를 치르면서 사망자가 2,000명을 넘어섰을 때, 런던에서 전쟁 당사자들간에 평화 조약이 맺어진 것은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였다.(6) 1825년 새뮤얼 모스Samuel Morse는 뉴헤이번에서 치러진 아내 루크리샤Lucretia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워싱턴에 있었는데, 거기서 코네티컷까지 가려면 꼬박 나흘이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보의 역사를 밝혀 놓은 스탠디지의 《빅토리아 시대의 인터넷Victorian Internet》이란 책을 보면, 모스가 최초로 대중용 전보를 만들어 내고 나서 약 20년 정도가 흐른 1870년대에 이르자, 6,005만 마일에 이르는 전선과 3,000마일에 이르는 해저 케이블이 깔리면서 런던에서 봄베이로 소식이 오가는 데는 단 4분밖에 걸리지 않게 되었다.(7)---1장 「집중력 분산의 뿌리를 찾아서」 중에서
하지만 종국에 가상 세계가 물리적 세계를 밀어 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현실 속의 우리 자신을 뒤로 하고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셰리 터클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끝없이 긴장 상태에 있는 그 두 세계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디디고 있다. …… 그 와중에서 우리는 가상의 현실을 실제 현실보다 더 선호하게 된다. 물론 사람들이 사기 결혼을 당하거나, 둔감한 부모를 만나거나, 우정이 시들해지거나, 실연을 당했을 때 그 관계에서 벗어나는 방법들을 여러 가지로 모색해 온 지는 이미 오래다. 하지만 우리가 어렴풋이 빛나는 세계를 계속 맛보면서 거기에 조금씩 더 발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정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 현실에서 등을 돌리고 가상 세계를 둥둥 떠다니겠다는 선택을 자주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신기루에 배부른 떠돌이족이 되고 말 것이다.---2장 「죽은 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사람들」 중에서
현재 미국인 중 집 밖에서 식사를 하거나 이동 중 식사를 한다는 사람은 거의 절반에 달한다.(2) 식비에서 외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40퍼센트에 이르는데, 1990년대의 25퍼센트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다.(3) 식당 음식을 차에 탑승한 채 주문하는 경우도 25퍼센트에 달해, 1998년의 15퍼센트보다 늘어난 양상을 보였다.(4)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이동하는 가운데 음식은 어디에나 있다 보니 식사에 대한 정의까지 새로 쓰이고 있다. 현재 미국인 중 “식사”를 아침, 점심, 저녁의 정식으로 한정짓지 않는 이들이 20퍼센트에 이른다.(5) 30년 전만 해도 멸시받기 십상이었던 간편한 스낵이 식사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반면 정식 식사는 여건이 되는 경우에만 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간식과 정식 식사 사이의 구분이 사라져 미국에는 일명 “스닐족(sn'ealer: 스낵snack와 정식 식사meal를 합친 합성어다 - 옮긴이)”이 넘쳐나고 있다. 이제는 초원의 풀을 뜯듯 종일 돌아다니며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4장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머물 곳이 없다」 중에서
탤벗은 고전적 의미에서나 현대적 의미에서나 기술 방면을 너무 훤하게 꿰고 있다. 그래서 그는 불굴의 항해자이자 “뛰어난 책략가”였던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잘 꺼내 든다. 이를 통해 정교한 기계를 사용하는 것과 그것들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디세우스는 뱃사람들을 홀리는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기 전에 선원들에게 밀랍으로 귀를 막고 자신을 돛대에 묶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끝없는 지혜를 약속하는 세이렌의 거짓 노래를 들어도 몸이 그에 따라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힘으로, 즉 지혜로운 평정심을 통해 세이렌의 계략을 물리쳤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만든 교묘한 장치를 이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내면의 기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내면의 기지가 없으면 우리의 삶을 우리가 만든 기계에 내맡기게 되어 버리는 데도 말이다. 이런 내면의 기지가 있을 때만 우리는 기계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고, 오로지 그때에만 아름답고, 차갑고, 분석적인 편협성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 ---7장 「기계화된 세상에서 사라지는 집중력」 중에서
이제 우꺸는 곧 집중력의 다양한 작동 체계를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인지 능력의 백미인 이 작동 기제가 파악되면 의식의 본성 자체가 밝혀질지도 모른다. 집중력의 비밀을 푸는 이 노정에서 포스너는 그 누구보다 선두에 서 있다. 그렇다고 그를 마법사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는 산만해지기 쉽고 이 세상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두뇌가 가진 비밀에 빛을 던지기 위해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삶의 노정을 우리가 더 잘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집중력은 단순히 이해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형성하고, 강화화고, 훈련할 수 있는 것이다. 숲길을 헤쳐 가며 그 발견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곰곰이 생각하다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드니 포스너는 꿋꿋이 길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8장 「집중력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 중에서
“배려하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돌보다. 참 달콤한 말이군요.” 앨런 월러스가 말했다. 스포츠셔츠에 면바지 차림을 한 그는 수도원에 있는 방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오래 숙성된 와인을 음미하듯 집중력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말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집으로 향하기 전 그가 마지막 생각을 내놓았다. “어떤 사람이 위험한 일에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어 목숨을 희생한다고 합시다. 예를 들면 아기를 구하고 죽는 경우 말입니다. 이러면 자기 삶을 한 번에 통째로 주는 셈입니다”라고 월러스는 스타카토처럼 톡톡 튀는 특유의 말투로 말했다. “참으로 멋진 희생입니다. 성경에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47) 정말 훌륭한 일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집중력)을 줄 때도 우리는 그만큼 우리 삶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겁니다. 돌려받지 않지요. 매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보이는 것에 우리의 관심(집중력)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집중력, 집중력을 기르는 것, 이것이 절대적인 핵심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비밀 열쇠죠.”
---9장 「집중력이 전해 준 선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