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등장인물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떠오른다. 몸을 꿈틀거리고 뭐라 중얼거리며 한 손을 뻗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담요를 제대로 덮어주고 아버지 입에 컵을 대어주다가 문득 생각난다. 아버지가 묻는다.
“거기 있는 거냐, 얘야?”
“그럼요, 아버지.”
샬럿은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그곳에 있지 않다. 은빛 심연으로 뛰어내리고 또 뛰어내린다. 이곳을 떠나 가을밤 속을 날아다닌다.
느닷없이 그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확신이 안 선다. 샬럿이 아는 사람 중에 그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나? 예전에 교회에서 본 가문 문장이나, 그녀에게 친숙한 아름다운 에어 강에서 나온 걸까? 공기air, 아니면 불fire에서 나온 이름인가? 불과 분노ire는 작품에 등장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격노. 억울해! 억울해! 분노와 보는 사람eyer. 샬럿은 지금 아버지 대신에 보는 사람이다. 그녀는 훔쳐보는 사람, 관찰자가 되었다. 볼품없는 평범한 여자plain Jane, 사랑하는 여동생 ‘에밀리 제인 브론테’의 중간이름, 용감한 잔다르크의 ‘잔’과 가까운 제인, 재닛/자넷과 비슷한 제인, 꼬마 제인. 의무와 따분함, 어린 시절과 복종뿐 아니라 기백과 자유 또한 떠올리게 하는 이름, 도깨비의 이름, 요정의 이름, 절반의 영혼, 절반의 육체, 어둠 속의 빛, 위선 속의 진실, 보는 자의 이름. 제인 에어. ---pp.43~45
글을 쓰는 동안은 이 방, 고독과 어둠과 절망의 이 감방에서 달아날 수 있다. 그녀의 마음이 어디든 자유로이 떠돌아다닌다. 수치스럽고 가슴 아팠던 사연들을 용기 있게 고르고 거기에 구조를 부여한다. 순례자의 여정과도 같은 줄거리를 구상한다. 느슨하게 연결된 일련의 사건들, 계속 이어지는 위험과의 결투, 인과관계 등 이야기의 형태가 잡힌다. 그러자 인생과 사랑에 실패했다는 쓸쓸한 기분이 싹 가신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열 살배기 소녀는 은신처에 숨어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다가 악당 소년이 방해하자 이렇게 묻는다.
샬럿은 무력한 아버지 곁에 앉아 그 장면을 완성한다. 소년이 제인을 모욕하면서 소중한 책을 제인에게 던질 때, 샬럿은 제인으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한다.
“잔인하고 못된 자식! 살인마 같아!”
소녀의 머리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소녀는 그를 칼리굴라나 네로 같은 로마 폭군들에 비유한다.
샬럿은 순종적이었던 인생을 능동적으로 바꾼다. 그녀의 제인은 성난 짐승처럼 손톱으로 할퀴어대며 사납게 앙갚음하고, 그 벌로 붉은 방으로 쫓겨난다. 반항을 해보지만 잔인하게 그곳에 버려진다. 외숙모는 자기 남편이자 제인의 외삼촌이 숨을 거둔 방, 큼직한 침대 틀과 다마스크 커튼, 가려진 창문과 거울이 있는 그 방에 제인을 혼자 가두어버린다. 문이 잠긴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걸상에 앉은 제인이 포박당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 샬럿 역시 굳이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떠나면 아버지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pp.5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