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에서 1904년 사이에 국사범으로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은 수감 시기에 따라 위치가 다른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다. 분류하면 1902년 4월 25일 이전에 체포된 사람들은 서소문의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고, 그 후에 체포된 사람들은 종로의 한성감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러므로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안국선, 이승인 등이 모두 종로 전옥서 자리의 한성감옥서에서 수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 기존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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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긍의 편지에는 자신의 신앙 체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자신이 죄수가 아니었다면 복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이며 복음이 아니었다면 죄를 뉘우치는 마음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여 자신이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유학자로서 유학이 천도(天道)를 밝히는 데 있어서 기독교보다 미흡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원긍의 편지는 그가 옥중 입교에 대하여 언급한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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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속에서는, 김정식이 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에서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후에 신약성서를 두세 번 읽는 중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유사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정식은 특히 『천로역정』과 저자 존 번연의 생애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김정식이 감옥에서 읽은 한글 『천로역정』은 게일과 부인 해리엇 깁슨(Harriet E. Gibson)이 공동으로 번역하고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42개의 삽화를 첨부하여 1895년에 출간한 『텬로력뎡』을 말한다. 『텬로력뎡』은 감옥서 서적실의 인기 대출 서적 중 하나였을 만큼 김정식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독했다.
--- p.96
결국 옥중 입교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교회는 언더우드가 담임목사로 있는 정동교회와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는 연동교회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東署) 연화방 연지동에 위치한 연동교회와 중서(中署) 정선방 대묘동과 북서(北署) 양덕방 계동, 안국방 소안동에 있는 이원긍, 홍재기, 유성준, 이준 등의 거주지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게일과의 유대관계까지 생각하면 옥중 입교인들이 연동교회를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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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김정식의 활동의 중심은 1904년 10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한국인 수석간사로 임명되면서 시작된 기독교청년회 활동이다. 특히 1906년 8월부터 1916년 8월까지 10여 년 동안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의 초대 총무로 활동한 경력은 이후에도 그의 생애를 ‘기독교 청년운동의 장로(長老)’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연동교회 교회학교의 시작과 발전에 기여하고, 국민교육회를 통한 근대적 교육운동에도 참여했다.
--- p.253
이원긍, 이상재, 유성준은 처음 출석한 연동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 그 후 유성준은 1909년에 박승봉, 이여한 등과 함께 안동교회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원긍은 1910년에 묘동교회를 설립했다. 이상재는 계속 연동교회 교인으로 남아 있었는데, 1912년 3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노회 임시노회에서 장로 후보로 추천되어 이상재의 의견을 물은 후에 허락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후 장로 선출과 장립에 대한 보고가 없는 것으로 봐서 장로로 선출되는 것을 사양한 것으로 보이지만, 1914년 12월에 열린 경기충청노회 제7회 노회에 보고된 노회 직원 명부에서 중학교 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25 계속 연동교회에 출석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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