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혜숙 ruru100@yes24.com
시는 자본주의 사회의 세속성과 산업시대의 물신주의에 저항하는 반대중적 예술로 자리잡았고, 따라서 시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나라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고 한다. 대부분의 해외 출판사들은 시집 출간을 꺼리고 형편이고, 설령 시집을 낸다 해도 한정판을 찍어서 겨우 돌려보는 정도가 많다.
그러나 국내의 상황은 좀 다르다. 최근 전반적인 문학의 위기 속에서 시라는 장르 역시 점차 그 영역이 축소되며 독자층을 잃어 가는 게 사실이지만, 일제시대의 윤동주, 김소월 같은 민족시인에서부터 50-80년대의 김수영, 김지하, 박노해와 같은 참여시인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시는 사회참여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문학의 꽃으로써 당당히 자리를 잡아왔고, 드물지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더 나아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대중시'란 이름으로 철저한 상업성을 띄며 '시인들의 낙원'이란 이름으로 불리기에 이른다. 우리 사회에서 시는 낯설고 먼, 반대중적 예술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90년대 대중시의 정점을 이룬 대표적 시인으로 이정하와 류시화를 꼽지만, 사실 류시화는 안재찬이라는 본명으로 80년대 시동인의 혁신을 가져온 '시운동' 출신이다. 반면 서정적인 감성으로 사랑의 은밀함을 노래하는 이정하는 물론 지방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대중시'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볼 수 있다.
문단의 엄숙주의랄까 순수주의랄까, 평단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하지만 이정하의 시집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는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의 경지에 오른 시집이다. 일정 수의 고정독자까지 확보하고 있는 시인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주제를 비슷한 감성과 비슷한 문체로 담아 내지만, 신간을 내는 족족 어렵지 않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대중문화의 속성이 그렇듯, 이 시집 역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을 충실하게 대변하며 감성적인 문체로 은밀하게 마음을 헤집어 놓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리하여 그와는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랑은 가혹한 형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닫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랑은 왜 이처럼 현명하지 못한가 모르겠다.」
마치 시집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듯, 시인의 프롤로그 역시 시에서 느껴지는 멜랑꼴리한 감성이 그대로 묻어 난다. 사랑의 이율배반, 슬픔, 고독, 외로움, 은밀함 등을 다루는 그의 시들은 끊임없는 자기 복제를 거듭하며 왕성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간다. 그것은 마치 판에 박은 사랑을 다루는 비슷비슷한 가요들이 늘 인기를 끄는 것처럼,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 관심인 사랑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무기이며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삶아낼 수 있는 말랑말랑한 주제가 아니겠는가.
물론 시를 꼼꼼히 살펴보면 좀더 구체적인 것들이 보인다.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한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그리움이다.」와 같이 감상적인 시구는 듣기에 좋고 낭송하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당신을 나의 이름으로 지명수배한다」, 「언제나 그대 곁에는 아픔보다 더 큰 섬으로 내가 저물고 있다」와 같이 자극적이고 멋들어진 문체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가볍고 화려한 소비제의 모습을 닮아있으며, 연애편지의 단골메뉴가 될 만큼 근사하다. 또한 원본의 부록처럼 몇 편 되지 않지만 낙태나 앵벌이, 십대 접대부 등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함에 있어, 덜 정제된 형태의 압축은 오히려 솔직한 자기 반영의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물론 이정하 시의 매력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대중문학에서 상당 부분 의존하는 것이 바로 표제가 지닌 설득력이며,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라는 제목은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 매혹적이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은 이 표제가 마음에 와 닿아 선뜻 시집을 집어들었고, 적지 않은 공감을 느꼈다고 한다.
'대중'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다소 저급하고 통속적이라는 야유나 폄하는 종종 지나친 오해를 낳기도 한다. 눈 먼 대중을 재생산한다는 혐의를 차마 내버릴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돈이 좋다는 식의 베스트셀러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게 이 시대의 흐름인 것이다. 실제로 대중이 원하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자세는 때론 지나치게 정체되고 정형화될 위험을 안고 있지만 그것이 결국 문화의 근원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대중시를 읽는 것은 동시대의 흐름을 읽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또한 전세계에서 유래없는 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도 일정 부분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