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밤을 모르고 사랑을 좇기 위해 이튿날까지 뒤엉키던 몸이면 우리는 좋았다.
좋은 꿈 꾸라는 너의 말과 함께 돌아눕던 새벽들이, 맞댄 등 사이로 나눈 서로의 체온 속에서 비밀스럽게 흐르던 차가운 전율의 까닭이 이제서야 씻을 수 없는 천형天刑으로 선명하다.
(...)
악몽에 쫓기다 눈을 떠보면 너는 없었다. 네가 없다. 번갈아 입에 물던 젖은 담배 필터 위 선명하게 남은 네 입술도, 비 오는 날 발을 맞대고 나란히 누워 듣던 철 지난 사랑 노래도, 없다. 우리는 무엇이 급해 그토록 하나가 되고 싶었을까.
아니, 나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꿈속에서 쏟아지던 건 살갗을 두드리는 차가운 비도, 혼자 숨죽이는 너의 눈물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나였다.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나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을 뿐. 나를 담기 위해 들어간 깊은 너의 품속에서, 나를 잃었다. 맞물리며 서로를 찾던 몸이 네가 아닌 모든 나라는 걸 알았을 때.. 눈앞에 없는 너보다 잃어버린 내가 간절했다.
나는 너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
--- p.48
나의 정신적인 위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쯤이었다. 나의 공화당은 실패했고 어지러운 국란國亂과 민중의 봉기와 투쟁 따위로 아득한 정신 속이었다. 그때 네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떠났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잘 기억할 수 없다. 결코 정돈될 수 없는 투박한 나의 청춘이 생애 끝에선 과연 얼마나 매력적일까, 고민하며 찻잔을 두드리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순간의 기록을 위해 옮기는 발걸음은 언제나 빠르다. 나는 진작 균형을 잃었기에 너의 부재가 나를 무너뜨리진 않았다. 애초에 머무르긴 했던 것일까, 내가 가졌거나 잃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네가 떠났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어두운 실내에서 외출도 없이 며칠을 갇혀있다 어느 구원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듯 밖으로 나왔다. 매캐한 연기를 걷고 안구를 사정없이 투광하던 세상의 빛이, 온 땅에 낭자한 선혈을 높은 하늘까지 묶어놓은 듯 선명한 자줏빛이었다. 신비하다. 신비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동안 축적된 모든 나의 불행이 역류하는 듯 일순 숨을 쉴 수 없었다. 횟배 앓던 삶이 깨끗이 씻겨나가며 새로운 영혼이 잦아들고 있었다. 아랫배가 차다.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그동안의 기록을 떠올린다. 축적된 불행, 불가항력적 권태, 불안, 불면.. 나의 모든 순간은 온통 不이었다. 여태껏 나는 무너져야 마땅한 사람이라 굳게 믿었는데, 이제는 무언가 잘못됐다. 깨진 유리잔 밖으로 넘치는 물처럼, 내 영혼의 방향을 걷잡을 수 없다. 가늠할 수 없다. 역동하는 이 생애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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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착같이 매달리는 어느 불행한 시절의 초상을 찬찬히 살펴보았던 바로 오늘, 드디어, 죽음을 찾았다 드디어 죽었다! 홀로 걸어온 먼 길인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네 손 꼭 잡고 있었으니 마음이 퍽 고요하다 굴곡진 형이상학적 노정이 마침내 세상 밖을 향해 다시 한번 휘어지는 순간이다 가당키나 한 것일까 나는 스스로 목을 묶은 적도 없는데. 목을 묶지 않아도 손쉽게 감각할 수 있는 죽음이 굴곡으로 시시각각 우리의 몸을 통과하고 있다 굴곡은 형이상학을 낳았고 세상의 궁극적 근거는 너의 입술을 끝으로 알 수 없게 되었으니 너의 입술을 따라가다 보면 다만 죽은 줄 알았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그 망할 놈의 심장이 또다시 불끈거리고 있겠지 내가 굴곡이 되고 굴곡이 내가 되겠지 아아, 차라리 우레와 같은 총성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의 종말을, 나의 눈앞에, 현실로 이끌어주소서. 그러나 죽음이란 항상 새롭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덩달아 늘어나기도 하는 것이어서 육신의 무게가 조금씩 줄고 있는 게 이 때문은 아닐까 무게와 부피는 대부분 비례하는 것이니 나의 무게가 줄어드는 만큼 세상의 부피는 삶의 안팎으로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사실’의 무게가 마침내 버거울 때가 오면 나는 습관적으로 돌과 함께 차여보려 애쓰는 것이다 찬다는 것과 차인다는 것을 능동과 피동이라는 언어적인 오류 범위 내에서, 그 단순한 이미지만을 통해 떠올려보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의 모습처럼 동떨어지지 않고 동질감을 형성하여, 동이 닿지 않는 動과 同까지, 편협한 사고로부터의 확장이 계속해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 트는 속도보다는 느리고 해가 저무는 속도보다는 빠른 것인데, 일출보단 일몰 속에서 생애를 엿보곤 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호흡을, 완급을 조절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육질이 전에 없이 황홀할 것 같은 이 허물 속에 진실된 내가 단 한 장도 남지 않았음을 감각할 때 세상을 등지기로 하였으니 나는 반드시 서둘러야만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새벽마다 탐스러운 쇠붙이들 주렁주렁 달려있는 외관이 훌륭한 그 공장을 열어야만 하며 남공이든 여공이든 단도를 붙잡아 높이 차올리는 시늉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피만 보면 두 눈이 충혈되고 심장이 온몸을 통해 펄펄 끓으며 자학의 묘미에 다시 한번 혹해보기도 하는 것이었구나 사실 우리, 몫의 불행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전에 없던 나의 利己를 펼쳐 보이는 것은 아닐까, 염려를 했어 네 손목에 깊게 그어진 선을 따라 손 뼘 가까이엔 삶을 그 밑으로는 죽음을 사이좋게 걸어놓으며 이 복잡한 세상을 이분화하고, 아주 편리하고 즐거운 줄넘기 놀이를 통해 모든 피의 얼룩을 자꾸만 좇아보겠다는 말이다 전부, 전부인 것은 없다 내 삶도 그렇고 네 삶 또한 그럴 것이다 차인 돌처럼 쉽게 떠나지 못하고 굴러다니는, 이를테면
--- p.97
과장님과 부장님의 입원 권유를 받아들였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겠다는 말씀과 함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더 이상 직장에 머무를 수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러한 병증을 안고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변화의 기회를 마련해준 고마운 직장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건 가끔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니까, 조금 더 일찍 나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외로움을 맹신하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역동하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고난을 끊임없이 숨기며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보다, 무의식이 보내는 위기의 신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두려운 마음이 더 급했던 것 같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자만하지 않고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직장을 떠나게 된 이유가 업무의 과중 등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따위가 아닌 순수한 내면의 충돌과 기록에 生을 걸게 된 어느 불가해한 독립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이, 집에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직장을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갖게 했다.
집에 오자마자 짐을 쌌다. 가방 안에는 옷 몇 벌과 개인 소지품 그리고 책 8권―말테의 수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인간실격, 이상 전집,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강정의 키스, 김이듬의 히스테리아, 허연의 불온한 검은 피―이 전부였다. 병원에 가는 내내 안도와 두려움이 잔뜩 엉기며 온몸을 짓눌렀다. 약을 복용하면서 아무리 덤덤한 척해도, 天刑과도 같은 기록의 대가가 당연한 나의 몫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여봐도 사실, 두려웠다. (생략)
--- p.107
(...)
길 위에 우두커니 서있다. 세상을 등지는 것들에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 발원을 알 수 없는 검은 잎들이, 짓이겨진 심장 위로 다시 돋아나고 있었으므로. 의식적으로 염세에 젖어들며 쉴 새 없이 점멸하던 어두운 두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 내 이름에 반기를 들다 목청 속에서 끓어버린 외마디 비명들이 그제야 굽이굽이 죽은 강이 되어 삶의 역사 속으로 흐를 것이다. 나는 이제 양손에 땀을 가득 쥔다. 외로운 지상에 머물며 매일 밤 치러오던 나의 장례를, 잊고 싶지 않았다.
---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