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소크라테스의 삶, 특히 그의 사상을 재구성할 때 어느 하나의 증언을 통해 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그중 몇 가지 증언을 통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모든 증언을 통합해야 할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렇듯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학설을 재구성하기 위해 철학사가들이 맞서고 또 해결하고자 몰두하는 역사적·방법론적 문제를 두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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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독일에서는 새로운 입장이 빛을 보게 된다. 이것은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문제가 본질상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향후 오랫동안 지속될 일종의 회의론을 배태하게 된다. 이 입장이 밝혀낸 주요한 점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들”의 허구적 성격이다.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모든 면에서 잘못 제기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소크라테스를 언급한 증언들의 정확한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 몰이해는 다시 잘못된 해석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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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종종 고대 희극 작가들의 표적이 되긴 했지만, 플라톤이 《변론》(18b~d)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 것을 놓고 판단해보건대, 다른 어떤 작품도 《구름》만큼 그를 심하게 왜곡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사실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 섰을 때, 그는 399년에 자신을 고발했던 자들을 상대로 변론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최초의 고발자들" (《변론》 18b)이라고 일컬었던 사람들에 맞서서도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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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가들은 논박술(이하 "엘렝코스")의 여러 가지 논리적 요소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을 기울였던 반면, 정작 "엘렝코스"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즉 그것의 도덕적인 목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피스트》의 유명한 대목에서도 잘 나타나듯이(230b~e), "엘렝코스"의 논리적 차원은 그것의 도덕적인 목적에 종속된다. 소크라테스는 논박술을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즉 하나의 논제를 논파할 목적으로 실행했던 게 아니라, 자신의 대화 상대자를 더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펼쳤다.
--- p. 84
소크라테스가 분만을 담당한 혼은 앎으로 “풍만해진” 것들로서, 그것은 추락해 몸에 갇히기 전에 이 앎을 관조하고 획득했다. 혼은 이 앎을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각하지 못했는데, 혼이 신체 안에 묶여버리는 와중에 앎을 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산파술은 엄밀히 말해서 혼이 환생 이전에 획득했던 앎을 상기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 p. 99
소크라테스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의 대가라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 "엘렝코스"를 통해 젊은 대화자들 사이에서 스스로 무지하다는 자각을 촉발시켜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자각이야말로 좋음과 관련된 결핌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지식과 좋음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할 때, 그는 그 젊은이의 내부에 지식에의 욕망과 좋음에의 열망이 함께 생겨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젊은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야말로 자기에게 결여된 지식과 좋음을 체현하고 있기에, 자신의 욕망이 소크라테스에게 고정되고 또 그에 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게 된다.
--- p. 128~129
비록 "엥크라테이아"가 소크라테스x의 윤리학에서 위와 같은 중요성을 띤다고는 해도, 이것이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은 아니다. "엥크라테이아"는 분명 필수 불가결한 것이긴 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우타르케이아(자족성)"야말로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엥크라테이아"는 자족적인 상태를 준비하고 또 그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우타르케이아에 복무한다. 우리는 세 가지의 소크라테스적 요소가 서로 동급의 가치로 자리하지 않고, 일종의 위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p. 128~129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학설에 따라 도덕적인 항목들의 거처를 혼의 이성적 부분에 두는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비이성적인 부분에 연결시키며, 또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지식이 덕의 발생과 획득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덕은 “후천적 상태hexis”로서 본질적으로 습관의 결과일 뿐이므로, 덕을 갖추기 위해 그것의 본질에 대한 지식에 기대를 걸 수 없다. 《에우데모스 윤리학》의 한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덕-과학의 역설을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아주 도발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용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 아니라 그저 용감해지는 것이다.”(I 5, 1216b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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