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재즈와 재즈라는 운명에 걸려들었던 위대한 뮤지션들의 삶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이들 뮤지션들의 궤적을 좇아가다보면 벨뷰 정신병원을 만나기도 하고, 버드랜드를 만나기도 하며, 감옥이나 연병장을 만나기도 한다. 얼핏 보면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 장소들은 하나의 단어로 연결될 수 있다. 재즈. 이 책에 등장하는 뮤지션들 중 누군가에게, 그를 진단했던 의사가 마치 병명처럼 기록했던 단어. 어쨌거나 재즈가 일종의 열병과도 같은 것이라면, 뮤지션들은 자신을 집어삼킨 열기를 이기지 못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나는 몇 가지 형용사들을 떠올렸다. 가혹한, 불안한, 불운한, 험난한, 위험한 따위의. 하지만 재즈가 깊게 스며든 문장들을 읽다보면 이러한 형용사들이 하나로 수렴되는 순간들이 있다. 아름다운. 그러나 아름다운. ---「옮긴이의 글」
가끔 모든 도시들이 이러한 감각을 느낄 때가 있다. 런던에서는 겨울날의 저녁, 5시나 6시가 되었을 때가 이러한 순간이다. 파리에서는 카페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는 조금 늦은 시각에 이러한 순간이 나타난다. 뉴욕에서는 언제든지 이러한 순간이 나타날 수 있다. 협곡과도 같은 길들과 멀리, 너무나 멀리 떨어진 대로들 너머로 빛이 솟아오르는 이른 아침이면 이 도시가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빗속에서 자정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밤이면 도시의 갈망들을 갑자기 명확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낮이 끝나갈 무렵이면 사람들은 종일 점점 더 강력해졌던 무용함에 대한 끈질긴 감각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면 기분이 나아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다음 날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고립의 감각으로 끌려가게 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깨끗이 닦인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든, 혹은 더러운 접시들로 개수대가 가득 차 있든,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러한 디테일들 -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 침대 위의 시트 - 은 같은 이야기를 말해주는 바, 이 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창가로 다가가 비에 젖은 길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지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밀린 빨래를 하고 신문을 읽는 일이 전부인 주말이 다가오면 주중의 목적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월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들은 또한 알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이 어떤 방식으로도 눈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까닭은 이제 그들 자신들은 전날과 동일한, 견딜 수 있는 반복적인 절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중 모든 것을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모든 구혼자들의 유일한 희망이 그들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라는 시간이다. 그들을 생각하는 그 누군가가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한 여성이 어딘가에 놓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 도시가 그녀의 곁에서 축축한 모습으로 무너지고 있다고 느낄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노랗게 물든 유리창 너머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을 상상한다. 개수대 앞에 선 남자,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한 가족, 커튼을 닫는 연인들,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가 듣는 음악과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책상 앞에서 이러한 말들을 쓰고 있는 누군가를.
---pp. 105-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