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통적인 주석은 현미경을 통해 토라를 본다. 세부 사항과 본문 조각을 따로 떼어서 본다. 반면에 나는 망원경을 통해 본문을 보려고 노력했다. 유대교를 그토록 매력 있게 만드는, 우주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큰 그림과 여러 개념들 속에서 본문의 위치를 보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 p. 18
이스라엘 민족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출애굽기 앞에 창세기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토라는 정치적인 것보다 개인적인 것이 우선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는 노예와 자유, 기적과 구원, 압제로부터 백성 전체를 구한 것, 바다와 광야를 가로지르는 놀라운 여행 등 큰 주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법과 자유와 정의,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먼저 개인과 그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정치질서 자체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 마음의 복잡성을 상기시킨다.
--- p. 26
문제는 분명하다. 아담은 방금 전 자신을 죄로 이끈 게 아내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죽게 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왜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그녀에게로 향하고,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까? 그리고 그 직후에 그들이 에덴에서 추방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왜 그 부부에게 친절을 베푸실까? 그들의 죄의 상징, 곧 그들의 수치를 가리는 옷에 존엄성을 부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 p. 51
편집자주: 카렌 암스트롱은 홍수가 끝나고 인류가 거의 멸절된 후 하나님이 노아와 새로운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해 “너무 늦었다”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자비는 그의 분노처럼 임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노아 역시 그처럼 소름끼치는 잔인성을 보여준 신에게 기꺼이 경배한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 20세기는 긴 홀로코스트였다. 우리는 … 너무 많은 대량학살과 종족학살을 목격했다. 여기서 서둘러 하나님을 변호하는 신자들은 만일 우리가 전체 인류를 거의 파멸시킨 신을 옹호한다면, 그와 비슷한 대량 숙청을 자행한 지상의 통치자들을 정당화하는 것 역시 너무 쉽다는 사실을 성찰해야만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에 대해 흔히 부드럽고 일관된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인간이 자행한 잔혹행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반복되는 자연재해들로 인해 세상을 몸부림치게 만든 비극에 대해 성찰할 때, 자비로운 신이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창세기의 저자들은 유일신론 속에 내재하는 신학적 난관들을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공포와 잔혹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무디게 만들 정도의 고분고분한 신학을 구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야곱처럼,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 일부 유대인들은 고전적 유신론의 자비하며 전능하며 인격화된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를 고통스럽게 추구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 Karen Armstrong, In the Beginning, 45-47.
--- pp. 85-6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주는 7일 만에 만들어질 수 있지만, 인간 세계에서 심오한 변화를 수반하는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린다. 성경 드라마는 시간이라는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믿음은 지연 속에서도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이다. … 그것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이요, 모세와 선지자들과 그 뒤를 이은 자들의 믿음이었다.
--- p. 121
유대교는 생명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지속적인 훈련이다. 우리는 노예로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항상 작은 민족이었기 때문에, 힘은 숫자에 있지 않고 용기를 낳는 믿음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었으므로, 우리는 생명의 신성함을 결코 잊을 수 없다.
--- p. 151
편집자주: 히틀러는 1920년에 유대인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할 것을 나치당 강령으로 제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것이 당시 독일 인구의 1% 미만이었던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희생양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독일 인구의 97%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의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뿐 아니라,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유대인들이라는 점에서 패전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선동에 점차 대다수 독일 국민이 동조한 이유 가운데는 상당수 대학교수들과 목사들이 공개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기꺼이 나치당을 지지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1918년부터 1931년까지, 전쟁을 위해 발행했던 국채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전쟁 배상금 등 독일 정부가 갚아야 하는 부채상환액은 연간 국가 전체 수입의 38%에 달했으며, 1929년 대공황 후 실업률은 36%에 달했다. 반유대주의라는 단순 논리와 극단주의로 패전국의 수치심을 씻어줄 히틀러에 열광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학살을 겪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1938년 11월, 7000개 이상의 유대인 상점들과 267개 회당이 파괴되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설마”했다. 악의 세력이 얼마나 극악무도해질 수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던 때문이다. … 당시에 독일에 남은 유대인은 35만 명이었다. 폴란드를 침공할 당시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330만 명이었다. 나치는 1941년부터 1943년 초까지 매달 평균 225,000명, 1942-43년에는 매달 평균 325,000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오늘날 동성애자들에 대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혐오와 심리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1) 그들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different). (2) 그들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discomfort). (3) 그들은 가정과 교회, 사회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dangerous) 자들이다. (4) 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doing something). (5) 그런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의 거룩한 의무(duty)이다. 참조, Peter Hayes, Why? Explaining the Holocaust, W. W. Norton, 2017; Robert P. Ericksen, Complicity in the Holocaust: Churches and Universities in Nazi German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 pp. 174-5
역자주: 모든 한글 번역 성서는 “땅이 기름지지 않고,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창 27:39)라고 부정적 의미로 번역했다. RSV, NRSV, NIV도 마찬가지로 부정적 의미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히브리성경(타나크)과 KJV은 “땅이 기름지며,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는 곳”으로 긍정적 의미로 번역했다.
--- p. 208
왜 “선물”이 “축복”이 되었을까?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넉넉하다”(I have plenty.)라는 에서의 말을 야곱이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I have everything.)로 바꾼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이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씨름과 그 뒤에 이어지는 만남의 연관성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p. 269
종교와 신을 땅이 아니라 하늘의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훨씬 더 쉽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 죽음 이후의 삶이나 불멸의 영혼, 명상적인 고요 또는 신비로운 물러남처럼 말이다. 따라서 종교는 우리를 세상에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세상과 화해하게 할 수 있다. 즉 이곳은 하나님이 발견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무관심하거나, 어떤 면에서 인간의 고통은 오는 세상에서 보상을 받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화해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가 그의 유명한 말을 썼을 때 의미한 바였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요, 무정한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조건들의 영혼이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das Opium des Volkes)이다.”
--- p. 289
유대교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과의 교전(engagement)이다. 유대교는 우리를 삶의 고통과 명백한 불의에 대해 마취시키지 않는다. … 유대교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요청하신 가장 벅찬 일, 즉 관계, 공동체, 궁극적으로 사회를 건설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집을 창조하는 일에서 우리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유대교는 하나님과 사람과 씨름하고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p. 291
돌이킬 수 없는 손실, 뒤집을 수 없는 역사의 판결, 받아들여야 할 운명처럼 보이는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런 증거에 반대할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에 결코 그 증거를 믿지 않았다. 곧 역사적 필연성보다 더 강력하게 입증된 깨지지 않는 믿음, 신뢰,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망으로 유대인의 생존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야곱의 삶에 있는 단순한, 그러나 그리 단순하지 않은 문구에서 왔다. 그는 위로받기를 거부했다.
--- p. 311
더욱 가슴 아픈 또 다른 주제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야곱은 이삭이 자기보다 에서를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이 라헬과 그녀의 자녀들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야곱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나의 아버지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각각의 경우에 발생했음에 틀림없다고 느끼는 질문이다. 이제 우리는 요셉도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p. 384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 즉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때, 그들은 가장 잔인한 전쟁을 벌인다. 십자군과 지하드는 진리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프랑스 혁명에 뒤이은 학살과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잔학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 p. 401
회개를 하든 안 하든 과거는 확실히 불변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리 전체는 아니다. 요셉과 라키쉬의 말 이면에 깔린 혁명적 사상은 과거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일어난 일이고, 두 번째는 일어난 일의 의미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새로운 시간 개념이 탄생했다. 이것은 서구의 역사를 바꾸는 것 이상의 일을 했다.
--- p. 413
유대인의 시간은 항상 열린 미래에 직면해 있다. 마지막 장은 아직 작성되지 않았다.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그 이야기의 공동 저자다.
--- p.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