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딤 바라노프가 차르의 고문직을 내려놓은 후부터,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잦아들기는커녕 폭증했다. 가끔 있는 현상이긴 하다. 힘 있는 사람 대부분은 현재 머무는 직위로부터 자신의 아우라를 끌어낸다.
--- p.9
그때 이후 우리가 어둠 속을 더듬으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거든요.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우리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생각. 대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부여할 의미를 놓고는 얼마든지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엔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 독보적인 힘이니까요.
--- p.50
보리스는 회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좋겠나, 바쟈? 그날 나는 깨달았네, 너는 권력에 관심이 없어도, 권력은 너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는 걸.’
--- pp.104~105
비서실을 빠르게 통과한 뒤, 우리는 우체국장이 일하는 곳이라 해도 될 작은 사무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방주인은 연한 금발에 창백한 인상으로, 아크릴베이지 수트 차림에 회사원 같은 자세였어요. 아주 미세하게 냉소적인 느낌인데, 악수를 청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이라 하더군요
--- pp.113~114
러시아를 아는 사람은, 우리에게 권력이란 대지의 주기적 운동에 종속한다는 사실까지 알기 마련입니다.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 흐름을 바꾸는 시도가 가능하지요. 그러나 일단 운동이 시작되면, 사회의 모든 톱니 장치는 말 없는 불가역의 논리에 따라 제 위치를 찾아갑니다. 그런 움직임에 저항하는 자체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공전에 반하는 것만큼 헛된 일이지요.
--- p.165
‘내 지지도가 어디쯤 와있더라, 바쟈?’
‘60퍼센트쯤입니다, 대통령님.’
‘그래. 나보다 높은 자가 누구지?’
‘없습니다. 제일 가까운 경쟁자가 12퍼센트 언저리입니다.’
‘그렇지 않네, 바쟈. 눈을 들어보게나. 나보다 더 인기가 많은 러시아 지도자가 있어.’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스탈린.’
--- p.264
불과 얼마 전, 거리에 폭탄이 터지고 미군이 투표소를 점거하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도 선거가 치러졌죠. 분명 그곳에선 아무 문제 없이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달랐어요, 아무렴 그렇겠죠.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으니 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겁니다. (…)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의 고향이자 우리 해군 선단의 본거지인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한다니! 그들은 이 사태를 ‘오렌지 혁명’이라 불렀습니다.
--- pp.229~230
‘사실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들자는 거군요.’
이 친구, 들뜬 것처럼 보여도, 처음부터 내가 탐색하고 있던 멀쩡한 정신을 전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혁명할 필요가 없게 만들자는 거지, 알렉산더. 체제가 혁명을 품어 안으면, 혁명할 이유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 p. 241
프리고진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갔습니다. 어찌나 얼빠진 표정인지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어요.
‘생각해봐요, 예브게니. 서구인들은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이목을 끌려면 정치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해요. 여기서 안톤은 쓸모가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뷰티 카운셀링을 해줄 아가씨들이랄지, 비디오 게임광이나 점성술사 같은 인재들이에요, 알겠어요?’
---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