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아버지에게는 절대 복종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을 내 것으로 만든 후 권위와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구조는, 개인 차원의 성향이나 선악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 문제를 포함한다. 그것은 개인과 단체,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을 맺는다. … 우리 나라의 모든 하부 기관은 상부기관에 대해 사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최종적으로 육군 참모총장이나 국무총리조차 대통령에 대해 사적인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연쇄적·중층적 권위 구조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그것은 한 개인의 평범한 삶조차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이다.
--- pp. 206∼207
머니는 왜 서로 다른 세 얼굴을 가지고 세 아들을 그처럼 극진하게 사랑했을까, 그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물론 그것은 자식에 대한 본능적 사랑, 모정(母情)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얼굴 현상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전달되는 한국적 방식이 있는 것 같다. … 어머니의 '세 얼굴 현상'은 19살에 시집 오 새댁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았던 가부장제도에 대한 적응이자 응전이었다. … 세 얼굴 현상은 이래저래 우리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 그것은 3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자신의 얼굴은 내세우지 못한 채,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한 여인의 자화상이다.
--- pp. 119 ~ 121
나는 두 공간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어를 배웠다. 하나는 아버지를 대할 때 사용하는 존댓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를 대할 때 사용하는 반말이었다. … 나는 아버지, 은사님들, 선배, 직장의 상사, 공무원, 손님을 대할 때는 아버지 공간에서 배운 언어를 사용한다. 이때 사용하는 언어에는 어떤 정답이 있다. … 어머니, 내가 사랑하는 형과 동생, 친구, 후배, 직장의 부하를 대할 때 나는 '어머니 공간'에서 배운 언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는 내 마음의 진실에 보다 가깝고 내 느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소통과 지배의 언어이지만, 아버지가 나타나면 일순간에 거두어들여야 하는 말이다.
--- pp.32 ~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