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산다고 인정받고 싶은 적도 없었지만,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때마다 슛뚜에게 전화했다. 내 감정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만으로 나를 이해하는 그는 어떤 날은 나 대신 화를 내주고, 어떤 날은 함께 서러워했고, 어떤 날은 망설임 없이 나를 불러 술을 사줬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나를 감정의 호수에 오래 가두지 않게 만들었다. 위로의 말이 위로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 우리는 그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진심으로 공감했다. 가끔은 ‘그래, 말 안 해도 알아!’라며 상대의 마음을 미리 헤아렸다. 밤늦게까지 술과 넋두리로 속을 비우고,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의 일터로 헤어졌다. 낯선 이에게 상처받고, 답답한 상황에 가끔은 울어도 그와 부딪힌 술 한 잔에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그래, 내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두지 말자.
--- p.29, 「끝없는 알바의 굴레」 중에서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도덕 교육 때문인지, 여전히 진득하게 남은 유교 문화의 영향인지 희한하게도 나는 종종 가족 구성원들에게 연민과 죄책감을 느낀다. 안주용으로 간이 잔뜩 되어 나온 땅콩을 통으로 사다 먹으며 의사가 견과류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고 멋쩍게 웃던 아빠의 얼굴. 내가 그걸 뺏어다 베란다로 치워버리고 권장 섭취 분량만큼 소분 되어있는 견과류팩을 주문해 주었을 때 고맙다며 힐끗 쳐다보던 눈동자. 술에취해 아빠와 결혼하기 전의 삶이 어땠는지 중얼거리는 엄마의 목소리. 삐딱선을 타다가도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터트리던 남동생의 떨리는 어깨. 그 잔상은 정말 엉뚱한 순간에 머릿속에 나타나선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우리를 ‘가족’으로 묶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모두 개인일 뿐이다’.‘각자의 삶은 각자의 몫이다’. 그럼 이성을 켜켜이 덮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 더 냉정해질 수 있다.
--- p.53, 「가족」 중에서
사람들은 모든 걸 너무나 쉽게 좋고 나쁨으로 나눈다. 예를하나 들자면,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소심하고, 찌질하고, 답답한 사람들로 평가될 때 외향적인 사람은 사교적이고 재미있는 리더감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사회적 압박 사이에서 나도 한때 내향적인 나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억지로 밝게 행동하고, 피곤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면서 내 성격을 바꾸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던 때도 있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고 했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우울을 인정하면서, 내가 타고난 성향자체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단지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바꾸려고 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내향적인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선명한 장점이 있고, 나는 그 점들을 사랑한다.
--- p.76, 「우울을 인정하기까지」 중에서
일찍이 주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한다. 나는 내가 언제 죽고 싶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산다. 오늘은 웃었지만 내일은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서 미래를 걱정하여 지금 누릴 수 있는 걸 미루지 않는다. 한계에 부딪히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까지 쉬기도 한다. 우울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조차도 내 우울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이기적이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도망쳤으면 좋겠다. 우리는 습관처럼, 장난처럼, ‘죽겠다’, ‘자살각이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만, 나는 그 말을 그저 흘릴 수가 없다. 두 번째 사건으로 나는 새해 다짐을 바꾸었다. 매번 부정 탄다며 마음속으로만 새긴 다짐을 이젠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올해 목표도, 나를 혹사시키지 않기.’
--- p.80, 「나를 혹사시키지 않기」 중에서
특별히 대단한 활동을 하지 않아도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그 자체로 참 힘든 일이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참담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예민하고, 부정적이고, 이상한 사람으로 불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고 한국에 사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깨어있는 불편함이 무지한 편안함보다 나은 거라 믿으며.
--- p.172,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중에서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괴로운 자리다. 먼저 악의적인 말을 들었어도 끝내 예민한 사람이 되는 건 나고, 용기 내어 밝힌 소신은 유행처럼 번지는 정신병으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당당히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두려운 시절이 있었다. 시위에 갈 땐 염산이라도 맞을까, 사진이 찍혀 조롱이라도 당할까 두려워 모자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혼자보단 둘이 낫고, 둘보단 셋이 낫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술자리에서 “화장 좀 하고 다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군가의 성차별적인 농담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 때, 절친했던 친구가 안티 페미니스트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언제나 슛뚜에게 연락해 한바탕 하소연을 하고서야 폭발할 듯 들끓던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다. 슛뚜 뿐인가. 나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혜화역에서, 광화문에서 연대의 든든함을 피부로 느꼈다. 혼자서는 벅찬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p.178,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