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중고-중]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중고도서

[중고-중]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

정가
25,000
중고판매가
17,000 (32% 할인)
상태?
사용 흔적 많이 있으나, 손상 없는 상품
YES포인트
배송안내
  • 배송비 : 3400원(선불) ?
  • 두리몽실잡화점에서 직접배송
  • 도서산간/제주지역의 경우 추가 배송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 참고사항
  • 중고샵 판매자가 직접 등록/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매자가 해당 상품과 내용에 모든 책임을 집니다.

  •  한정판매의 특성상 재고 상황에 따라 품절 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866쪽 | 1256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0123752

중고도서 소개

사용 흔적 많이 있으나, 손상 없는 상품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독립 당시 호전적이고 강대한 민족주의국가들의 틈에 끼어 우리는 생존마저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에 비쳐져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안정과 성장 그리고 번영이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 책에는 국토가 640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고 천연 자원도 없는 이 작은 나라가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신봉하는 호전적이고 강대한 이웃 신생국들에 둘러싸인 틈새를 비집고 생존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의 상처와 일본 점령을 겪고, 싱가포르에 새로운 경제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오늘의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낙천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기 세대들은 공공질서, 개인의 안전, 경제와 사회 발전, 그리고 번영이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와 생존을 위한 기본적 조건으로서 국민이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정직하고 효율적인 정부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망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자서전의 첫번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판 <리콴유 자서전>)을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싱가포르, 일본 강점기,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속해 있던 2년 동안 일어났던 공산주의 폭동과, 그후의 민족 폭동을 겪었던 나의 젊은 시절의 기록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폈고 말레이의 일부로 살아남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수포로 끝났습니다.
일본 점령기(1942~1945년) 동안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그들의 잔인성은 나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나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자긍심, 그리고 핍박에 대한 거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는 영국에서 유학생으로 보낸 4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싱가포르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당당하게 품고 1950년 싱가포르에 귀국한 나는 앞으로 있을 위험과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내 세대의 많은 이들은 반 식민주의 물결에 한결같이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에 투신했습니다. 그후 정당을 결성해서 35세의 나이에 의회에 진출하여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합전선은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결별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때가 다가오자 그들과의 힘겨운 투쟁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의 장기적인 미래가 말레이 반도와의 재결합이 있다고 믿은 우리는 1963년 말레이시아와 합쳐졌습니다. 그러나 1년 후인 1964년 7월, 싱가포르에서는 중국계와 말레이계간의 대규모 민족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말레이계가 지배하는 말레이시아의 여당인 UMNO의 말레이 과격파들과 물러설 수 없는 일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역 폭동을 이용하려는 그들에 맞서 우리는 말레이시아 연대회의를 소집함으로써, 말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비 말레이계 인구와 말레이계 인구를 규합해서 말레이시아인만을 위한 말레이시아를 추구하는 세력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러나 1965년 8월,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괴롭힘과 위협은 우리 국민들이 홀로 서기 위한 고난을 기꺼이 이겨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민족 폭동의 아프고 슬픈 경험은 나와 나의동료들로 하여금 민족, 언어,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다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더 굳게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정부 정책의 지침이 되는 신념이었습니다.

국민소득 400달러의 극빈한 나라에서 한 세대 만에 선진국 수준의 3만 달러로 끌어올린 기적 같은 개척 정신

이 책은 독립을 유지하고 배후지인 말레이시아 없이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길고 힘겨웠던 역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 30년 안에 빈곤에서 해방되어 선진국으로서 번영에 이르기 위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홀로서기를 결심했던 1965년 이후, 우리는 불안하고 부침이 심한 세월을 지내 왔습니다. 우리는 1971년 영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대규모 실업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기름 값이 네 배나 뛴 석유 파동을 간신히 극복한 이후 비로소 우리는 이제야말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노력, 계획, 그리고 임기응변의 정책을 총동원해서, 무역과 투자로 주요 산업국가와 연대를 맺고 동남아 일대의 물자와 서비스 그리고 정보를 유통하는 중심지로서 생존력 있는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1959년(내가 처음 총리에 취임했을 때) 미화 40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90년(내가 총리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미화 1만 2200달러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던 1999년에는 미화 2만 2000달러로 뛰어올랐습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제3세계의 빈곤문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술, 문화 그리고 사회적 기준이 우리가 이룩한 선진국으로서 근본적인 기반을 완벽하게 성취하려면 또다시 30년이 걸릴 것입니다.
--- 저자의 말
독립 당시 호전적이고 강대한 민족주의국가들의 틈에 끼어 우리는 생존마저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에 비쳐져 있었다.

나는 이 책을 안정과 성장 그리고 번영이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 책에는 국토가 640평방 킬로미터밖에 안 되고 천연 자원도 없는 이 작은 나라가 민족주의적인 정책을 신봉하는 호전적이고 강대한 이웃 신생국들에 둘러싸인 틈새를 비집고 생존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의 상처와 일본 점령을 겪고, 싱가포르에 새로운 경제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은 오늘의 젊은이들처럼 그렇게 낙천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기 세대들은 공공질서, 개인의 안전, 경제와 사회 발전, 그리고 번영이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치와 생존을 위한 기본적 조건으로서 국민이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정직하고 효율적인 정부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망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자서전의 첫번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판 <리콴유 자서전>)을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싱가포르, 일본 강점기,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속해 있던 2년 동안 일어났던 공산주의 폭동과, 그후의 민족 폭동을 겪었던 나의 젊은 시절의 기록을 담았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폈고 말레이의 일부로 살아남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수포로 끝났습니다.
일본 점령기(1942~1945년) 동안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한 그들의 잔인성은 나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나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자긍심, 그리고 핍박에 대한 거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는 영국에서 유학생으로 보낸 4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싱가포르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당당하게 품고 1950년 싱가포르에 귀국한 나는 앞으로 있을 위험과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내 세대의 많은 이들은 반 식민주의 물결에 한결같이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노동조합운동과 정치에 투신했습니다. 그후 정당을 결성해서 35세의 나이에 의회에 진출하여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가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합전선은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결별을 예감하고 있었고, 그때가 다가오자 그들과의 힘겨운 투쟁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싱가포르의 장기적인 미래가 말레이 반도와의 재결합이 있다고 믿은 우리는 1963년 말레이시아와 합쳐졌습니다. 그러나 1년 후인 1964년 7월, 싱가포르에서는 중국계와 말레이계간의 대규모 민족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말레이계가 지배하는 말레이시아의 여당인 UMNO의 말레이 과격파들과 물러설 수 없는 일대 생존을 위한 투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역 폭동을 이용하려는 그들에 맞서 우리는 말레이시아 연대회의를 소집함으로써, 말레이시아 전역에 걸쳐 비 말레이계 인구와 말레이계 인구를 규합해서 말레이시아인만을 위한 말레이시아를 추구하는 세력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러나 1965년 8월, 우리는 말레이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괴롭힘과 위협은 우리 국민들이 홀로 서기 위한 고난을 기꺼이 이겨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민족 폭동의 아프고 슬픈 경험은 나와 나의동료들로 하여금 민족, 언어, 종교를 초월해서 모든 국민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다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심을 더욱 더 굳게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정부 정책의 지침이 되는 신념이었습니다.

국민소득 400달러의 극빈한 나라에서 한 세대 만에 선진국 수준의 3만 달러로 끌어올린 기적 같은 개척 정신

이 책은 독립을 유지하고 배후지인 말레이시아 없이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길고 힘겨웠던 역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 30년 안에 빈곤에서 해방되어 선진국으로서 번영에 이르기 위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홀로서기를 결심했던 1965년 이후, 우리는 불안하고 부침이 심한 세월을 지내 왔습니다. 우리는 1971년 영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대규모 실업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1973년 기름 값이 네 배나 뛴 석유 파동을 간신히 극복한 이후 비로소 우리는 이제야말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노력, 계획, 그리고 임기응변의 정책을 총동원해서, 무역과 투자로 주요 산업국가와 연대를 맺고 동남아 일대의 물자와 서비스 그리고 정보를 유통하는 중심지로서 생존력 있는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매진해 왔습니다.
1959년(내가 처음 총리에 취임했을 때) 미화 40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90년(내가 총리에서 물러났을 때)에는 미화 1만 2200달러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던 1999년에는 미화 2만 2000달러로 뛰어올랐습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제3세계의 빈곤문제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술, 문화 그리고 사회적 기준이 우리가 이룩한 선진국으로서 근본적인 기반을 완벽하게 성취하려면 또다시 30년이 걸릴 것입니다.
--- 저자의 말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 1978년 10월 내가 카터 미국 대통령과 재회했을 때도, 그는 아시아에 별 관심을 안 보였지만, 보좌진의 설득으로 주한 미군철수 공약을 철회한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 나는 말과 행동으로 "자유는 질서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유교주의를 실천했다. 동양 사회의 주된 목적은 질서 있는 사회를 이룩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나는 리펑 중국 총리에게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역사 교과서에 과거의 침략행위에 대한 진실을 왜곡해서 편찬하는 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부활시킬지도 모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덩샤오핑의 표정과 몸짓은 경악스런 심정을 드러냈다. 그는 내가 진실을 토로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그는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실상이 제시되었을 때 미리 준비됐던 방향에서 벗어난 언동을 기꺼이 하는 공산주의 지도자를 나는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소련에 군사력 사용의 명분만 주지 않으면 그들은 곧 큰 위기에 봉착한다는 내 예언은 적중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있은 직후, 나는 본에서 독일 총리 슈미트를 다시 만났고, 헨리 키신저, 에드워드 히스, 조지 슐츠 등의 지도자들과 자유로운 토론 끝에,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련을 격퇴시키고,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적극 돕기로 합의했다.

* 장쩌민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중국과 타이완 대표가 싱가포르에서 원활한 회담을 갖게 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하였다. 1949년의 내전 이래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최초의 중국과 타이완의 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 포드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수 8일 후에 만난 나에게 "미국은 이제 어디로 가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혼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서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대답했다.

* 1991년 1월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났는데, 당시 미국·영국·프랑스 군대가 이라크를 포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위력을 보이며 전쟁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개인 집무실에서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 스코크로프와 함께 보다 광범위한 아랍과 이스라엘의 상황에 관한 토의를 하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 점심식사 후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레이건은 중국의 장쩌민 주석에게 '최첨단 무기'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 있는 자신을 압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또 자신이 장 주석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납득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레이건은 나와 장 주석이 가까운 사이임을 알고, 그의 메시지로 인한 실망감을 내가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 나는 노령화 사회에 귀감이 되고자 72세의 나이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 나는 총리 재임 9년 만에 재충전의 필요를 느꼈고, 앞으로의 국제 정치는 미국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하버드 대학의 명예 연구위원으로 초청을 받고, 연수의 기회를 얻어 고명한 교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 1995년에 나와 부총리인 장남이 집을 샀는데, 특혜 시비가 일어 자진해서 정부 당국의 철저한 조사를 받았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으나, 나는 그 우연의 결과로 얻게 된 100만 싱가포르 달러를 정부에 돌려주었다. 정부가 그 돈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되돌려 주어, 나는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

상품정보안내

  •  주문 전 중고상품의 정확한 상태 및 재고 문의는 PC웹의 [판매자에게 문의하기]를 통해 문의해 주세요.
  •  주문완료 후 중고상품의 취소 및 반품은 판매자와 별도 협의 후 진행 가능합니다. 마이페이지 > 주문내역 > 주문상세 > 판매자 정보보기 > 연락처로 문의해 주세요.

부적합 상품 신고하기 신고하기

  •  구매에 부적합한 상품은 신고해주세요.
  •  구매하신 상품의 상태, 배송, 취소 및 반품 문의는 PC웹의 판매자 묻고 답하기를 이용해주세요.
  •  상품정보 부정확(카테고리 오등록/상품오등록/상품정보 오등록/기타 허위등록) 부적합 상품(청소년 유해물품/기타 법규위반 상품)
  •  전자상거래에 어긋나는 판매사례: 직거래 유도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판매자 배송
  •  택배사 : CJ대한통운 (상황에 따라 배송 업체는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배송비 : 3,400원 (도서산간 : 6,000원 제주지역 : 6,000원 추가 배송비 발생)
배송 안내
  •  판매자가 직접 배송하는 상품입니다.
  •  판매자 사정에 의하여 출고예상일이 변경되거나 품절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중고품절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