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뭔가를 하고 있다. 아무 접점이 없어 얼굴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인간들이…… 살아 있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중에서
이런 세상이지만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중에서
도로 곳곳을 마비시킨 사고 차량들의 운전자들은 대개 보균 상태였을 것이다.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사고를 겪었을 터다. 의식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운전대를 쥐었으니 음주 운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서까지, 목숨을 앗아갈 만큼 심한 1기의 통증과 고열을 견디면서까지 다들 어디로 가려 했을까.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중에서
이런 세상이어도 밤에는 자고 낮에는 움직여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소화가 되면 일을 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죽지 못해서 부자연스러운 일을 자꾸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차만 있다면. 살기 위해서는 좀 더 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내게는 그게 남편을 면회하는 일인 거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중에서
노안이라는 낱말의 질감은 오래 도망치다 마침내 붙잡힌 사람이 느낄 법한 무력감과 이상한 안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늙었구나. 모르지 않았으나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
---「젤로의 변성기」중에서
“꼭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 돼, 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 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 거의 평생을 소년의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젤로의 변성기」중에서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는 다음, 다음 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낡아버린 몸에 소년의 음성을 지닌 여자 오선재의 몸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젤로의 변성기」중에서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겠지만 언제가 되었든 어떤 계기로든 네가 이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너의 젤로에게도 변성기가 올까.
---「젤로의 변성기」중에서
그도 그럴 것이 한나와 클레어는 사실 옷만 바꿔 입는다면 누가 한나고 누가 클레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 그런 경우는 뜻밖이랄 것도 없이 흔하다.
---「한나와 클레어」중에서
그렇지만 모처럼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마침 날씨도 좋은 날에, 내가 가지 못했던 장례식과 장례식이 있기 몇 주 전 장례식의 주인공하고 나눈 대화를 연속으로 떠올린 이상은 도서관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도서관에 가면…… 불을 지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세네갈식 부고」중에서
얼핏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
---「세네갈식 부고」중에서
그리고 드바와 나는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세네갈식 부고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산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주기로. 그때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바와 자주 주고받던 농담의 일종 또는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고상하고 많이 상스럽고 쓸데없이 비장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실없는 농담, 애서가들만의.
---「세네갈식 부고」중에서
나는 그냥……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드바의 영정 사진 같은 것은.
나는 드바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드바를 생각하면 피곤하기도 했다. 드바는 늘 싸우고 있었고 그건 생활 도서관관장으로서 드바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나 또한 항상 물러서지 않는 드바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던 거다, 내가 드바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드바와 함께하는 동안에 느낀 피로감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세네갈식 부고」중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진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태어날 때부터 여자였는데 어째서 여자가 되고 싶어야 하는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해왔다. 그런 자신이 주변 트랜스여성 커뮤니티에서 유별난 케이스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으나 어딘가에 자기 같은 사람이 또 없으리라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혹시 안 되면 배 아파서 어떡하지? 해외에도 아직 사례가 별로 없는 수술이어서 어마어마하게 비싼지라 원정 수술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데 국내 상용화가 언제 이루어질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도 나 같은 그러나 나 아닌 누군가는 그 수술을 받아서 엄마가 되는 꿈을 이룰 텐데, 그럼 얼마나 부럽고 분할까.
---「김수진의 경우」중에서
있잖아, 보통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둘이서 만드는데 말이지. 너를 만드는 데에는 수 세기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누적된 의료 지식과 수백 수천억대의 자본과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노력이 들어갔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야.
---「김수진의 경우」중에서
나는 목이 잘려 죽는다. 언젠가. 오늘은 아닌 미래에. 멀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사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감각한다. 마치 이미 나 자신이 목 잘려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나, 나, 마들렌」중에서
차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내 팔에 닿아 있는 이 미지근한 건, 누구 살이지…….
---「나, 나, 마들렌」중에서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나와 똑같은 손으로 후려친 다음 아파하면서, 동시에 나처럼 놀라고 불안해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존재가 꿈이 아니었다.
---「나, 나, 마들렌」중에서
내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 나, 마들렌」중에서
그 순간 무겁고 날 선 도끼가 정수리 한가운데를 빡 하고 내리치는 듯한 격통이 있었고 나는 따뜻한 피자가 치즈를 늘어뜨리며 갈라지듯 찌익, 쩌억 하고 둘로 나뉘었다. 마들렌의 눈앞에서. 아, 이런 식이었군. 의식이 있는 채로 갈라진 건 또 처음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나, 나, 마들렌」중에서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
---「마치 당신 같은 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