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은 사실'헤라의 영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이 내린 난사를 극복했다는 것은 신의 시험을 통과했다는것을 뜻한다. 하나의 영웅이 만들어지기위해서는 신과 인간, 자연이 모두 동원돼 그의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고난이 없는 성취는 없다. 신이 인간을 시험하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역사를 만들어가야 하는 우주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험을 통과한 영웅에게 신은 영광을 선사한다. 인간의 영광, 영웅의 영광은 곧 신의 영광이다. 신과 인간은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지만 이렇게 종국에는 하나로 만난다. 우리가 삶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헤라클레스의 영광은 헤라의 영광이요, 헤라의 영광은 헤라클레스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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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각 부위의 중요한 면(정면 혹은 측면) 위주로 조합된 인체상은 이상적인 부분끼리의 조합이므로 완전하고 완벽하며 장중한 형상이라는 느낌을 준다(동물의 이미지상의 정면은 대부분 옆면이다. 말이나, 개, 물고기를 그릴 대 우리는 대부분 옆면을 그린다. 그러나 사람은 일반 동물과 달리 정면이 두 개이다. 앞면과 옆면이 그것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앞쪽의 숨겨졌던 부분이 드러남에 따라 정면이 두 개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흠없는 인간, 영원히 썩지 않고 스러지지 않을 초월적 존재의 인상을 준다. 신과 파라오, 귀족만이 이렇게 그려지고 평범한 사람들은 곧잘 이런 법칙과 관계없이 꽤 사실적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이 양식의 이데올로기적 좌표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선명히 전해주는 부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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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화에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신이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사이에서 약자인 인간을 도우려다 고난을 당하는 선구자로 그려져 있다. 이 구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은 운명과 싸워야 하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포자기 하는 것은 노예나 하는 짓이다.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은 그런 운명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매일 결단하며 투쟁하는 데 있다. 그것이 자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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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더 이상 서양문명의 노예가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우리의 땅은 노예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서양문명을 더 잘 알 필요가 있다.
그림의 호소력은 강하다. 그것은 물강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마음을 움직인다. 논리로 사람을 설복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논리를 인정한다 해도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는다면 설복은 요원하다. 그러나 뛰어난 예술은 좀더 용이하게 마음의 방어체계를 무너뜨린다. 환영이 심어지고 그 잔상은 오래간다. 환영은 살아 있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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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보다도 이쁜 님프들에게 둘러싸여 잇는데 제정신을 차릴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될까? 정신이 몽롱해진 힐라스는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엉거주춤 물 쪽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 그림에서 물은 아프로디테의 탄생 배경이 됐던 물과 마찬가지로 강한 성적 이미지를 띠는데, 번 존스가 그린 <바다의 심연>에서는 그 이미지가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번 존스의 그림에서 의식을 잃은 남자는 매우 수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고, 인어같은 여자는 남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장악하고 있다. 물 속에 들어간 힐라스의 처지가 아마 이와 같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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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서양미술이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양인들로 하여금 현실이나 일상을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 화가들은 인체를 해부해야 했고, 동물의 운동을 관찰해야 했으며, 빛과 원근법 따위를 공부해야 했다. 의사들도 처벌이 두려워 해부를 꺼리던 시절, 미켈란젤로는 왜 목숨을 걸고 시체 해부를 했을까?
다빈치는 미술가이면서 왜 굳이 수학과 공학을 전문가 수준으로 공부했을까? 인류애 때문이 아니라, 한 마디로 '앎에의 욕망' 때문이었다. 그 어떤 종교나 이념, 사회적 권위로부터도 제약받지 않는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욕망 말이다. 이 같은 욕망을 이단시하지 않고 용인한 최초의 고대 문명이 그리스 문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가 고도의 자연주의 미술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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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횃불은 원래 아프로디테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에로스도 횃불을 빈번히 들고 나타난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프뤼동이 콩스탕스 마예와 함께 그린 <아프로디테의 횃불>을 보면 아프로디테는 횃불을 든 채 앉아 있고 에로스 하나가 가까이 다가와 자신의 조그만 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사랑의 횃불은 성화가 연달아 붙여지듯 에로스의 도움으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이어준다. <아프로디테의 횃불>에서 횃불 말고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다른 중요한 부분은 배경의 에로스들이 펼치는 각양각색의 표정과 제스처이다. ........
이렇게 갖가지 사랑을 연출하고 부채질하다 보니 에로스는 본의 아니게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일부 신들의 분노를 사 벌도 부지기수로 받았는데, 특히 처녀성을 소중히 여기는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여신의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 p.134~135
그림만 보면 우리는 그 어떤 역사의 굴절이나 격정같은 것을 느낄 수 없다. 매우 평온하고 아름다운 풍경화일 뿐이다. 포키온과 관련된 인간사의 갈등을 이렇듯 작은 점경으로 축소하고, 큰 침묵으로 광대하고 유구한 자연을 표현한 푸생. 이 작품은 그가 포키온 사건으로부터 2000년 가량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시간의 거리'와, 인간사야 어떻게 출렁이든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영원히 정연한다는 이성론자로서 그의 확신이 갖는 '인식의 거리'가 녹아든 결과이다. 그 거리는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깊이가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 푸생에게 '철학자 화가'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처럼 '거리'를 표현할 줄 아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 pp.274-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