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쓰러져가며 영혼의 외침처럼
비밀 이름이나 비밀 번호를 알려주듯
상처받은 마음을 내게 털어놓았지.
어떻게 그대가 전에 자살을 시도했던가를 고백했지.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쉴 새 없이 키스를 해댔지.
겁먹은 별 같던 그대. 나는 그대 품에 감싸여
은밀히 호텔로 들어갔지. 어떻게 갔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나. 그곳에는 그대와 나 두 사람만 있었지.
그대의 몸매는 물고기처럼 날씬하고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웠지.
그대는 나의 신세계. 나의 신세계.
- 35p, 럭비 스트리트 18번지 중
너무나도 날씬하고 신선하고 꾸밈이 없는 그대는
비에 젖어 고개를 끄덕대는 라일락 가지.
몸을 떨며, 기쁨에 겨워 울먹였고,
신성으로 넘쳐흐르는 대양의 깊은 심연이었어.
천국이 열리는 걸 봤다고 했지.
핑크색 울로 짠 드레스를 입고 그대가 서 있는 것이 지금 내 눈 앞에 선하군.
그대의 동공은 눈물의 불꽃을 서로 다투어 발하는
잘 깎인 보석,
컵 속에서 흔들리다 나에게 던져진 보석.
- 51p, 그대의 웨딩드레스 중
나는
마치 생명 없는 사람처럼, 계속 걸어갔지.
마음속으로 여우 새끼를 놓아주고,
미래 속 런던으로 녀석을
집어던져 넣어놓고는 서둘러
곧장 도망치듯 지하철로
뛰어들었지.
새끼 여우 때문에 벌어질 일은
결혼 생활을 테스트하고 입증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내가 파악했더라면,
나는 테스트에 실패하지 않았을 거야. 그대는 실패했을까?
그러나 나는 실패했어. 우리 결혼은 실패였어.
- 155p, 깨달음
그녀는 마치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갑자기 충격을 받아 멍하니 꼼짝도 하지 않았지.
그리고는 그대의 얼굴을 향해 권총을 쏘는 것처럼
한 손가락으로 그대의 얼굴을 가리켰고, 고드름이 얼 듯
온 힘이 손가락으로 집중된 것 같았어
“브 끄레베레 비앙또(너 금방 뒈질 거야).”
그녀의 검은 얼굴은
제로미노의 얼굴 같은 기름칠한 가죽 매듭,
고대 페루의 결승 문자, 원망스런 눈초리는
포도 찌꺼기 같은 원한, 옛 프랑스 사람의 악의,
마지막 한 마디는 성당보다 무겁고
크고 어둡고 훨씬 더 깊게 자리를 잡았지-
- 157p, 집시 여인 중
때때로 나는 생각해 보지,
결국 그대 자신은
두 손이 낀 두 짝의 장갑이었다고.
때때로 나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기도 해-
나도 역시 둔감한 장갑처럼 선택되어
그대의 두 손에 끼워져서
두 손이 필요로 하는 것을 했다고.
여기에 있는, 이 빈 장갑.
그 속에 있는 지문
장갑으로부터 그대의 두 손은 사라져버렸지.
- 249p, 그대의 두 손 중
그대의 긴 벨벳 스커트는 핏빛의 옷감,
진한 적포두주였어.
입술은 젖어 있는 듯한 진홍빛.
그대는 붉은색을 몹시 즐겼지.
나는 그것이 덜 아문 상처처럼 느껴졌어-
얇은 딱지가 생기며 굳어져가는
상처의 언저리처럼. 나는 속에 드러난 혈관.
딱딱해져 반질거리는 피부를 만져볼 수 있었지.
그대는 뼈를 치료하는 흰색을 피해
붉은색 구덩이에 숨어 있었어.
그러나 그대가 잃어버린 보석은 푸른색이었지.
- 266p, 붉은색 중에서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