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근로’가 아닌 ‘노동’을 말한다. 나아가,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노동 인문학’을 제안한다. 삶에 새겨지는 노동의 무늬를 살피자는 것이다. 또한 성장 중심으로 ‘근로자’를 대하는 관점에서 삶을 중시하는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달리 보자고 말한다. ‘노동 인문학’은 불안정한 노동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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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넓은 스물세 살 이웃 청년과 함께 세상의 그늘을 걷는 ‘다크 투어’였는데도 그와 함께 다니는 길은 유쾌하고 즐거웠다. 나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 걷고 또 걸었다. 함께 다니면서 비극적 죽음에 가려진 그의 명랑한 삶에 주목하게 되었다. 짧은 그의 삶에서 풍부한 유머와 입담, 삶에 대한 낙천성, 긍정과 배려의 에너지, 고통에 직면하는 용기를 찾아냈다. 당신은, 좋은 사람 옆에 있으면 괜히 기분 좋아지는 것을 느껴 보셨는가. 전태일을 깊이 알게 되면서부터는 가진 게 많지 않아도, 부쩍 더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부심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전태일은 내게 지금을 잘 볼 수 있게 해 주는 가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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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아테네 광장의 민주주의에 여성, 아동, 노예는 초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경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일하는 한국 사회 지하층의 지도를 ‘그늘의 지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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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도로 세상을 본다면, 한국 사회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결 구도와 화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시대에도 산업화의 후유증, 극심한 양극화 문제는 다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전부 차지한 소위 ‘진보와 보수’의 시각으로 세상은 사과 반쪽처럼 잘라지지 않는다. 경제 민주화는 도래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저 두 낱말의 동맹으로 간결하게 정리되는 상황 속에 소외되는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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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를 전태일과 함께 들여다본다. 50년 전의 평화시장 또한 이 지도의 한 점이 되어 ‘동시대’가 되었다. 수십 년 차이로 인해 그 구체적 조건과 맥락은 다르지만 전태일의 평화시장과 오늘 우리가 일하는 경기장 지하가 동시대가 되는 것은, 이 죽음의 경기를 결국 멈춰야 한다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지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경기장을 허물고 사람들이 자기 마을로 돌아가 평화를 일구는 것까지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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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은 검게 탄 몸으로 열 시간 가까이 버티다가 밤 10시 넘어 숨을 거두었다. 그는 그때까지 남은 힘을 그러모아 어머니, 친구들에게 확답을 듣고야 만다.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서 하겠느냐는 다그침이었다. 큰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는 계속 물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그러겠노라고 크게 대답하였다. 그의 마지막 날은 어머니 이소선, 삼동회 친구들, 그 소식에 감응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마음이 내려앉은 세상 사람들에게 첫날이 되었다.
태일은 고단한 숨을 거두며 이들의 생명 속으로 자기를 쪼개어 두루 퍼졌다. 한쪽 눈을 맹인 예술가에게 주고 태일피복 설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편지까지 보냈던 태일은 결국, 자신의 온몸을 기증해 사람들의 눈을 열었다. 3년을 달달 외운 근로기준법이 새겨진 온몸을 태워, 사람들 눈에 안 보이던 평화시장이, 그 안의 사람이 결국 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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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의 짧은 생애에서 우리는 결국 ‘사랑’을 찾아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전태일은 외면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사람들의 아픔을 돌보지 않고 달려가는 빠른 기차를 멈추려고 레일 위에 올라섰다. 그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잠시나마 평화시장의 가혹한 삶과 노동조건을 들여다보았다. 이후로도 젊은 사람들이 일하다 다치고 죽어 나갈 때, 사람들은 그의 사랑과 인간 선언을 기억하곤 하였다. 그렇게 50년이 흘렀다.
--- p.324
지도를 보며 함께 다닌 당신과 나, 그리고 전태일이 말하는 것은 ‘사랑의 공공성’이다.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일과 집, 돈, 밥, 의료와 교육을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며 평생을 탕진하는 일 없는 ‘사회적 사랑의 그물망’을 만들자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 시민들이 맘껏 꿈을 실현하고 소박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불평등한 경기장을 무너뜨리고 평화로운 마을과 그 마을들을 잇는 오솔길을 만들자는 말과 생각의 근거를 길게 썼다. 일과 행복과 사랑의 공공성으로 가는 새 길의 밑그림은, 이제 함께 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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