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걱정하기보다 내 일을 지금 하면서 순간순간 지나가는 바람결에 내 소식을 전하면서 지금 여기서의 삶을 만끽하는 게 행복한 삶의 전형이다.
물건을 사며 순간적인 욕망을 충족하기보다 경험을 사면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사막 마라톤이나 자전거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달성을 위한 여정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비상하는 꿈을 압축해놓은 최고의 인생학교라는 사실이다.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게으른 권리보다 적극적 의무에 가깝다.
책장에 갇힌 죽은 언어보다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언어를 벼리는 시인들의 사유체계를 모방해보자. 언어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지 말고 자연의 화음을 언어로 벼리는 과정을 반복해보자. 이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언어를 구출, 몸으로 겪어내는 앓음다운 체험을 어제와 다른 ‘생각의 옷’으로 번역하는 안간힘을 써보자.
매사가 ‘걱정’이지만 또한 매사가 ‘격정’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움에 가시가 돋아 낯선 질문으로 잉태된 날선 언어들이 뜨거운 모루 위에서 벼림을 당하며 어제와 다른 언격(言格)으로 거듭나는 시기가 오십이다.
우리는 모두 내 삶의 CEO(詩理悟)다. CEO는 시詩를 통해 세상의 이치理를 깨닫는悟 사람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물음을 던져 ‘뜻 밖’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들으며 남다른 조합으로 놀라운 ‘깨달음’과 ‘깨우침’을 배우고 싶은 사람, 그래서 작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감동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 보면 어떨까. 대작과 걸작도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始作)해야 시작(詩作)될 수 있다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한 편의 함축적인 시처럼 자제와 절제를 온몸에 새긴다. 자전거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적 상상력을 연결시켜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고 가는 장편 소설을 구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전거는 내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편의 서사시이자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일대기를 쓰기도 한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다. 무너질 거 같다가도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사기 덕분에 다시 살아내는 재미를 만끽하기도 한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내 숨결을 채집해 세상 살아가는 지혜의 연료나 원료로 쓰겠다고
사선으로 떨어지는 눈발처럼 지금까지의 삶은 지향하는 대로 방향이 결정된 적이 거의 없다.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지만 걸음걸이는 언제나 휘어진 사선이거나 곡선이다.
책장에 갇힌 죽은 언어보다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언어를 벼리는 시인들의 사유체계를 모방해보자. 언어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지 말고 자연의 화음을 언어로 벼리는 과정을 반복해보자. 이제 ‘생각의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언어를 구출, 몸으로 겪어내는 앓음다운 체험을 어제와 다른 ‘생각의 옷’으로 번역하는 안간힘을 써보자.
중년은 한순간 뜨겁게 불타오르다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정열보다 비교적 오랫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게 하려는 열정이 지배하는 나이다.
중년은 니체를 읽다가 주식에 투자하고, 소크라테스를 읽다가 뱃살을 걱정하는 신경세포가 거미줄처럼 뒤엉켜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의 전형이다.
중년은 한계를 알면서도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지혜의 다락방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감상하는 예술 지상주의자를 꿈꾸는 나이다.
통념을 깨부수고 늘 다르게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면서 남다른 상상력으로 건져 올린 깨달음을 적확한 언어로 녹여내는 일이 정중동 속에서도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전거는 한 편의 함축적인 시처럼 자제와 절제를 온몸에 새긴다.자전거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적 상상력을 연결시켜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고 가는 장편 소설을 구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전거는 내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편의 서사시이자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일대기를 쓰기도 한다.
온몸으로 글을 써야 글 속에 몸이 사투하며 생각의 흔적이 남는다.
인생은 반전의 연속이다. 무너질 거 같다가도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사기 덕분에 다시 살아내는 재미를 만끽하기도 한다.
인간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힘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자전거 타기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는 이유는 상습화된 승객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일상에서 만나는 색다른 마주침을 즐기기 위해서다.
자전거 타기는 무한한 대지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나를 전경으로 드러내는 안간힘의 연속이다. 먼동이 터오기 직전에 자전거를 타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는 출근길의 배경은 희망의 서곡이나 다름없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얼마든지 나의 의지대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공간을 창조하거나 연출할 수 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매순간마다 만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아름다운 경치다.
움직인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도 바뀐다. 자전거 타고 내가 가본만큼 나의 사유도 더불어서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자전거를 타며 지구 자전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자동이 아니라 수동(手動)의 위력과 마력을 온몸으로 경험해보고 싶다.
자전거는 철저하게 아날로그적이다. 아날로그는 디지털과 다르게 출발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노고와 정성이 깃들어 있다. 아날로그가 느림과 여유와 상상을 추구한다면 디지털은 속도와 효율과 촉급함을 상징으로 한다.
자전거는 반복되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도 이전과 다른 상상력을 품고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혁명의 출발점이다.
편견과 선입견 또는 오해는 몸으로 부딪치며 우여곡절의 경험을 통과해야 비로소 이해로 바뀔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안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삶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연극이 아니라 각본대로 되지 않는 임기응변이다. 자전거 타기는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대응하는 생각지도 못한 묘기를 개발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삶을 어제와 다르게 바라보려는 호기심 어린 눈이 있어야 늘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을 가꿀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나는 숱한 현상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을 향해 오감을 열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마음껏 탐구하는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가장 멋진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우선 건강한 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면서 밝은 세상을 희망차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끊임없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삶은 음양이 연주하는 다양한 이중주다. 절망과 희망, 밑바닥과 정상, 배경과 전경, 음지와 양지, 걸림돌과 디딤돌, 내리막과 오르막, 실패와 성공, 슬픔과 기쁨, 낯선 길과 익숙한 길이 뒤바뀌고 순환하면서 삶의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간다.
“때로는 진지한 숙고보다 횡격막의 발작이 우리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는 법이다.” 발터 벤야민이 남긴 명언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이야기다. 나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 내가 담겨 있다. 나를 바꾸려면 이야기를 바꾸면 되고, 이야기를 바꾸려면 삶을 바꾸면 된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경시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전거는 경탄의 대상이자 경이로운 삶의 즐거움을 주는 마법의 기구다.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자전거는 그저 관망과 관조의 대상이지만 그걸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자전거와 혼연일체가 되어 매일 자전거 타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에게는 자전거는 생필품이 아닐 수 없다.
자전거 길을 가다보면 논길을 옆에 두고 아스팔트길도 있고 우레탄으로 깔아놓은 편안한 길도 있다. 다 같은 하천길이지만 가로수가 만든 그늘 길도 있고, 땡볕을 그대로 받으면서 참고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포장도로도 있고 비포장도로도 있다. 때로는 잠깐이지만 자갈밭 길을 통과해야 되고, 직선주로를 따라 직진만 하면 되는 길이 있는가 하면 굽이굽이 돌아가며 곡선주로를 지나는 사색의 오솔길도 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나뭇잎을 밟고 지나가는 길도 있고 양옆으로 이름 모를 풀들이 정다운 행렬을 유지하며 반겨주는 길도 있다. 노을이 넘어가는 길도 있고 달밤에 별빛이 노래하며 반겨주는 길도 있다. 잠시 멈춰 서서 쉬고 싶은 길도 있고 힘들지만 버티고 견디면서 조금 더 가야 되는 길이 있다.
노곤함을 이기는 유일한 묘안은 노곤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믿고 앞으로 나가려고 힘쓰는 발버둥이다.
올라갈 때는 즐겁고, 내려 갈 때도 즐겁다는 말이다. 올라갈 때만 즐거운 게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내려가면 실수나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려갈 때는 즐겁다.
오르막에 오르는 여정을 즐기다보면 정상에 이른 후에도 자만하지 않는다. 정상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다시 올라가야 되는 경지이다. 경지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노곤함을 이기는 유일한 묘안은 노곤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믿고 앞으로 나가려고 힘쓴느 발버둥이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변화를 위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변화를 위한 조급한 결심에 머물러 있는 안타까움이다. 변화를 추진하겠다는 다급한 갈망 자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는 언젠가 추진하겠다는 어설픈 다짐으로 관성이 되어 자리 잡는다. 다짐도 습관이 되어 타성에 젖는다.
진실을 응시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부패와 타락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생긴다. 세계는 인간을 고정시킨다. 역할에 고정시키고, 영역에 고정시키고, 계급에 고정시키고, 집단에 고정시키고, 이데올로기에 고정시킨다.
낯선 사고(事故)가 나에게 색다른 사고(思考)를 잉태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 삶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 사고와 실패, 좌절과 불안, 실망과 절망의 얼룩과 흔적이 삶을 아름다운 무늬와 깨달음의 향연으로 만들어가는 원동력이다.
사고(事故) 덕분에 내 사고(思考)가 바뀌었고 사건(事件) 덕분에 색다른 사유(思惟)를 잉태할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서 숱하게 경험한 사건과 사고가 끝나는 지점에서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런 사건과 사고를 겪는 과정 자체가 나의 삶이고 배움의 터전이다. 삶은 모든 순간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계기로 다가온다. 나는 섬진강 자전거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나는 자전거는 움직이는 인생학교임을 배웠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완성되고, 실력은 실패하는 와중에 생기며, 시작은 언제나 끝에서 출발한다. 망하기 전에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을 때 전율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절망하기 전에 온몸은 절망하기 직전까지 사투를 벌이며 견뎌내야 한다, 막상 실패로 끝나고 좌절로 이어지는 순간은 찰라, 오히려 실패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서 상처가 생기기 전에 슬픔은 소리 소문 없이 엄습해오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주름은 마치 구겨진 종이와 같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 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정석대로 접은 비행기보다 멀리 날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의 주체적 의지대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력(耐力)이 생긴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내가 겪은 모든 주름의 흔적은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용오름처럼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기류를 타며 자기 존재를 ‘아름’답게 드러냄으로써 한편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필름’으로 남기기도 한다.
열심히 매진하고 몰입하다가도 갑자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어서 거들먹거리는 시간도 많을 때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뭔가를 갈구하다가도 수단과 목적이 구분되지 않고, 뭐가 뭔지 혼돈스러울 때 ‘푸르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하며 ‘거무스름’하게 인생이 흑백논리나 양자택일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하나의 잣대로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게 보여도 내면으로 축적한 인생의 ‘주름’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이런 모든 직간접적인 경험의 축적이 ‘주름’으로 생기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몸으로 겪은 신체성의 추억이 어울림의 장편 서사로 간직되기를 기원하면서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마지막 후기를 쓰기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만끽하는 과정에 중독될 때 습관적 궤도에서 벗어나 탈주하는 삶의 밀도감이 높아질 수 있다.
몸을 관통하지 않은 시어는 시시하거나 관념의 파편이 함축과 절제미 없이 마구 표출된 감정의 쓰레기일 뿐이다. 몸으로 겪어냈지만 적확한 언어를 만나지 못하면 몸에 각인된 체험의 흔적은 감동을 주는 기적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겪은 체험적 흔적이 운 좋게 언어를 만나는 순간 안간힘을 쓰면서 담아내려는 시인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시어에 담긴다. 시인이 선택한 언어에는 압축된 감정의 농도가 절제된 상태로 긴장을 품고 숨어 있다. 체중이 실린 언어는 가볍지 않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사투를 벌인 시인의 흔적이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기껏해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표현이 가능하다. 표현이 불가한 특정한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나 찰나의 순간에 문득(聞得) 드는 생각,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았던 교훈이나 체험적 노하우를 고스란히 언어로 전환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깨달음의 흔적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언어로 포착되어 표현되지 않는 감각적 각성은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갈 언어를 기다린다. 느닷없이 언어가 자신의 세계로 침범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세상으로 언어가 끌고 나갈 수도 있다. 자신을 끌고 나간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전히 표정은 밝지 못하고 뭔가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표정이 잠재되어 있다.
우발적 상황과의 마주침 속에서 깨닫는 깨우침으로 어제와 다른 위기대응능력으로 맞서서 나갈 뿐이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 접어들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양산하는 경우도 있다.
사고(事故)치면서 몸으로 겪은 체험적 흔적들이 우리들의 사고(思考)를 바꿔나갈 뿐이다.
모든 순간은 저마다의 의미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자 순간이다. 순간의 축적이 어느 날 기적을 만든다. 모든 기적은 순간의 노력이 축적되어 생긴 앓음다운 흔적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몸이 먼저 느끼고 머리가 알아차린다. 늦기 전에, 더 늙기 전에 신체성이 삶의 구체성과 맞붙어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 더 행복해져야 한다.
우리가 순간을 만끽하며 행복한 충만감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가? 결정적인 순간은 사전에 계획을 세워서 만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히 다가오는 마주침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이 바로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내 인생의 운명도 바꾸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지금, 여기서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을 즐기지 못하면 내일 저기 가서도 여전히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지 못한다. 남은 나이가 몇 살인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말은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의미다. 지금 이 순간이 언제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내일은 다른 순간을 위해 오늘의 행복한 이 순간을 희생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결정적인 순간은 격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만끽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시선(視線)의 차이는 동선(動線)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동선(動線)은 실제로 발걸음이 움직이며 남긴 족적(足跡)이다. 발걸음이 바뀌어야 체험의 깊이와 넓이가 바뀌며, 결국 그것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원동력이다.
땀은 탁월함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근육이 사투 끝에 흘리는 눈물이다. 이처럼 삶은 연구대상이 아니라 살아감이자 살아냄의 기록이다.
땀 흘려 얻은 교훈은 땀흘려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경계 너머의 깨달음이다.
생(生)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며, 아파하는 울부짖음 속에서도 저녁노을이 부르는 어둠을 맞이하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모두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일 수는 없으며, 매번 맞이하는 아침이 경이로운 기적일수는 없어도 보잘 것 없는 보행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행보로 다가오는 나이가 오십이다. 바람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내 인생악보를 구성하는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되지만 곤경 속에서도 풍경을 낳는 상상력이 생을 지배하는 위력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