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주인공 홀든의 꿈처럼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버렸다! 머리에 쓴 헤드셋이 쇠코뚜레처럼 느껴지고 높은 파티션으로 둘러싸인 상담 공간이 호밀밭만큼 낭만적인 일터는 아니지만, 곤경에 빠진 고객을 돕는 콜센터 상담이나 금융범죄를 막는 부정사용 모니터링 모두 뛰어노는 아이들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고 싶어 하던 홀든의 작은 소망과 비슷한 일이다. 스무 살 고객의 보이스피싱 피해를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듯 파수꾼 임무는 자꾸만 실패하지만, 나는 어느 오래된 팝송 제목처럼 오늘도 조금씩이나마 세상을 구하려 안간힘을 쓴다.
---「나는 오늘 세상을 구했어요」중에서
오십 넘은 아들이 자꾸 당신 카드를 가지고 나가 유흥업소에 다녀서 골치라는 할머니 고객이 전화로 하소연을 해온다. 원하시면 아드님이 카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분실신고를 해드리겠다니까 행여 자식이 술값을 못내 경찰서에 잡혀가기라도 하면 안 된다고 거부한다. 아드님이 귀가하면 카드를 돌려받아 어디 감춰두라 하니, 실직하고 돈도 없는데 야박하게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럼 카드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잘 타이르라 하니 자식이 엄마 말은 안 듣는데 따박따박 말 잘하는 상담사님이 대신 전화해서 잘 말해주면 안 되겠냐고 간청한다. 죄송하지만 그건 상담사가 해드릴 수 없는 일이라 하니 할머니는 한숨을 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재능의 기원」중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콜센터 상담사들이, 아니 노동자라면 대부분이, 만족스럽지 못한 임금과 대우 앞에서 만약 누군가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운운하면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뀔 것이다. 그럼에도 막상 콜이 들어오면 나는 이게 얼마짜리 노동인가를 잠시 잊고 고객에게 집중한다. 상담이 만족스럽게 끝나고 친절하게 상담해 줘서 고맙다는 고객의 인사를 받고 나면 기분이 괜찮다. 사실 욕설의 충격이 강해 기억에 오래 남을 뿐이지 상담사는 욕설보다는 고맙다는 인사를 훨씬 더 많이 듣는다. 어쩌면 세상에서 감사 인사를 가장 많이 듣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은 기분을 마음 한구석에 쌓아두면 진상 고객을 겪을 때 버티는 힘이 된다. 세상에는 이런 진상보다 친절한 상담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여기면서.
---「값 매길 수 없는 선물」중에서
진정성 없는 친절에 질린 이들이 따스한 온기를 지닌 다정함을 갈구하는 현실이지만, 감정의 역사에서 선후를 따지자면 다정이 친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굳이 먼 옛날 추운 겨울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몸을 부비던 동굴 속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다정함은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작은 마을공동체든, 울타리 안의 가까운 이들끼리 본능에서 우러나와 서로를 아껴주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작은 공동체가 커지면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과 함께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된다. 익숙한 이들 간의 따스한 정으로 유지되던 공동체를 떠나 낯선 공동체로 들어가 이방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도 많아진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타인들인 거대한 사회에서 다정함만으로 협력과 경쟁의 룰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친절함과 다정함」중에서
서울신문에서 2020년 기획한 달빛노동 리포트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안타까운 목록이 나온다. 그 해 상반기 동안 산업재해로 사망한 야간 노동자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목록이다(이마저도 근로복지재단에서 조사하고 승인한 최소 수치일 뿐 확인되지 않은 사례가 훨씬 많아 통계를 정확히 내기도 어렵다고 전한다). 웹상에 올라온 노동자의 부고 하나하나에는 국화꽃 사진이 놓여있다. 공장 생산직 노동자, 택배 노동자, 경비 노동자, 건설 노동자, 택시 기사, 식당 노동자… 내가 어느 아침 퇴근하고 야간 근무자 특수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병원을 꽉 채우고 있던 이들, 밤샘 노동으로 피곤에 찌든 눈빛에 서둘러 오느라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한 노동자들 중에 그들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밤들, 나와 다른 공간에서 야간노동을 함께 한 연대의 마음으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달밤에 스쾃」중에서
형석 씨가 콜센터 마지막 식사를 컵라면으로 때우는 게 마음에 걸려 집에서 만들어 온 펜네 파스타를 좀 나눠주었다. 한 입 먹고는 자기 입맛엔 별로라며 손도 안 댄다.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를 물으니 콜센터는 벌이가 적어 보증빚 갚기도 돈 모으기도 힘들다며, 일단 더 벌이가 될 일을 찾아 2년쯤 바짝 벌어 빚을 갚고 이천만 원쯤 자금을 마련하면 다시 중국으로 가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한다. 목소리를 낮춰 나만 알고 있으라면서 잘 하면 크게 터질 사업 하나를 구상했다고 말해준다.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무슨 스마트폰용 앱을 개발해 중국에 파는 계획이었다. 놀라서 언제 IT쪽 개발 기술까지 공부했냐고 묻자, IT쪽은 완전히 문외한이고, 아이디어만 떠올린 거라고 한다. 원래 사업할 때 실무는 사람을 쓰면 된다며 나에게도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대뜸 청한다. 무모하고 과감한 저돌성. 저게 사업자 마인드구나. 대화 내내 파스타 맛 별로라고 한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마음이 약간 상해있는 나와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소설가 발자크가 그려낸, 출세와 신분 상승을 욕망하며 세상과 투쟁하는 야심 가득한 주인공 같았다.
---「줄어든 사나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