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탈 교인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교회에 갔으나, 지금은 1년에 한 번도 안 가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연구의 첫 번째 단계는 간단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증명하거나 반증하고자 했다. “현재 우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도 빠른 종교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이 단계의 모집단 규모는 1,043명의 미국 성인이었다. 우리가 수집한 데이터는 우리의 명제를 강하게 뒷받침했다. 이전에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출석 교인 수 변화는 남북전쟁 이후 25년간 일어났다. 1870년부터 1895년 사이, 사람들이 전쟁 이후 삶을 재개하면서 출석 교인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변화는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변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단, 지금은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성인의 약 15%(약 4천만 명)는 교회 출석을 사실상 그만두었으며, 이 탈교회 현상의 대부분은 지난 25년 동안에 일어났다.
--- 「머리말」 중에서
우리는 교회를 떠난 가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부모, 조부모와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함께 슬퍼했다. 특히 50세 이상인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 자주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사연에는 중독, 파괴적인 행동, 성적 혼란, 심지어 자살까지 포함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50세 이상인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떠난 성인 자녀가 최소한 한 명은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자녀나 손주가 신앙을 회복하고 좋은 교회로 돌아오기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난 자녀로 인해 힘들어하는 몇몇 부모와 함께 거의 20년 동안 기도해 왔다. 그들의 고통과 고뇌,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와의 관계적인 갈등이 자녀가 교회를 떠나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연구 결과, 교회를 떠난 복음주의자 중 68%는 그 결정에 부모와의 갈등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표 1-3〉 참조).
--- 「1. 늘어 가는 빈자리, 경고장이 날아들다」 중에서
톰과 같은 사람들은 대개 의도치 않게 교회를 떠났다. 적응하기 힘든 사회적 문제들, 교회에 또래가 별로 없는 점, 교회에서 겪은 안 좋은 일 같은 요인을 들 수 있다. 공동체와 인간관계가 온라인과 일터로 이동하는 것도 한 요인이다. 삶이 바빠지고, 일터에서의 성공으로 여행과 취미 생활을 할 여력이 커진 것도 요인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다. 분명 어느 정도 관계적인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명목상 크리스천들은 대체로 교회에서 심각한 상처까지 받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일과 가족, 다른 관심사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 일이나 사회적 관계, 신뢰성의 조건에서 기독교는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유익도 제공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심지어 기독교가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기 시작했다. 필시 이런 상황이 이 그룹의 탈교회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쁜 소식의 한복판에 실로 좋은 소식이 있다. 세상의 톰 같은 사람 중 절반은 복음주의 교회로 돌아갈 용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조사에서 그들 중 3%만 ‘절대’ 교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이 교회로 돌아올까?
명목상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 중 상당수는 사회적인 이유다. 여기에 기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렉스가 톰에게 취했던 접근법은 효과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에서 우리는 여러 부류를 살펴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권유하면 교회로 돌아올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녁 식사 자리로 초대하는 것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들은 수년간 인내와 기도로 꾸준히 돌봐줘야 한다.
--- 「3. “기독교 문화는 좋지만, 예수를 믿는 건 아니다.” _ 명목상 크리스천」 중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 몸의 일부가 된다.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실제로 그분의 몸이 된다. 그리고 손이 팔에 연결되거나 눈이 얼굴에 있는 것처럼 서로 하나로 묶인다. 우리는 이 몸을 교회라 부른다. 물론 지금 교회는 불완전하다. 우리는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추문을 경험한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그분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예수님은 곡식 가운데 가라지가 있고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때가 되면 그것들을 다루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교회 안에서 어떤 실망스러운 일이나 해를 경험했다 해도 그곳에서 더 큰 복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복음을 당신이 받을 좋은 소식으로 인정하면 교회는 당신의 몸이요 가족이 된다. 이탈 교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한다. 복음은 좋은 소식이며 우리를 하나로 묶어 준다.
--- 「11장 ‘불완전한 교회’에 임하는 ‘은혜의 완전함’을 전하라」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주변 문화가 타락하지 않게 보호하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교회 역사 속에서 이 작용은 교회가 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왔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초대 교회는 사회 변두리에서 활동했지만 불과 몇 세대 만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가 그 문화의 윤리적 근간을 크게 변화시켰다. 또한 ‘힘을 가진’ 크리스천들이 사회나 복음 전파에 항상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서구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불의, 노예 제도, 인종 차별을 조장한 자들은 바로 권좌에 있던 크리스천들이었다.
우리는 우리 도시의 유익을 추구해야 하는데, 힘 있는 자리에 앉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권력의 가장자리에 있지만 그들이 새로 터전을 삼은 곳의 유익을 추구하라고 명령하셨다(렘 29:4-7).
권력의 가장자리는 매력적이거나 편안한 곳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곳에서 초대 교회를 통해 강하게 역사하셨으며 지금도 동남아시아에서 그렇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기 바란다. 우리는 국회에 들어가지 않고도 산 위의 동네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권좌에 앉지 않고도 소금이 될 수 있다. 미국 문화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의 나라는 건재할 것이다.
--- 「14장 안락함을 떨치고 나그네요, 종으로 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