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성문 기준에서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여러 죄의 양반들이 살고 있었는데 교만양반, 탐욕양반, 음란양반, 불의양반, 추악양반, 시기양반, 악독양반, 허영양반, 방탕양반, 게으름양반, 사치양반, 미움양반, 거짓양반, 살인양반 등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 사는 양반들은 이 성을 장악하고 있는 주류 중의 주류로서, 이 성의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모든 기구가 여기에 모인 것이다. 성의 행정, 사법, 군사 등 요직이란 요직은 다 이 양반들 차지였다. 그만큼 성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어떠한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성내의 주도적인 역할은 언제나 이 죄의 양반들 차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이 죄의 양반들과 달리 매우 도덕적인 양반들이 살고 있었는데 선의양반, 예의 양반, 법도양반, 경험양반, 칭찬양반, 인정양반, 존중양반 등이 그들이다. 여기 사는 이 양반들은 그 옛날 이 성의 입법권을 가질 정도로 매우 권세 있는 양반들이었지만 죄의 양반들에게 결정권을 내주고 난 이후 그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이들에게는 전통 양반이라는 자부심만큼 중요한 자산이 없었으며 뼈대있는 가문의 향수만큼 중요한 자랑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성향이 역설적으로 불신성을 좋게 만드는 일로 나타났는데, 성주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그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도덕 양반들의 역할에 따라 성주의 성 밖 이미지가 매우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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