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은 정신 일부가 마비된 사람처럼 살았다, 는 소감이다. 누가 웃으면 따라 웃고 누가 화내면 따라 화내고
누가 울면 그건 따라하기가 난처해서 어쩌지, 어쩌지 하고 서 있었다, 는 생각이다.
좀 더 마음이 맑았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누가 웃으면 화내면 울면, 아무 표정 없이 물끄러미 보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 p.22, 「모라토리엄」 중에서
그러다 보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 힘으로 얼마를 더 갈 수 있을까, 며칠을 더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되는데, 이번 주에는 왠지 필드 드롭 아이템이 넉넉한 것 같달지?
목요일에 만난 언니와 빌리프 커피에 갔는데 티라미수는 맛이 미묘해서 손이 안 간다고 하니 언니가 그랬다. 티라미수는 맛있기도 어렵고 맛없기도 어렵지. 언니와 밥을 먹다가 울었다. 밥 먹다가 운다고 재수 없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서 좋았다.
--- p.35, 「티라미수는 맛있기도 어렵고 맛없기도 어렵다」 중에서
시를 쓰는 친구에게서 너한테는 사랑이 엄청 중요한가 봐, 나는 시보다 중요한 게 이때껏 없었는데, 라는 말을 듣고 응! 티 많이 나? 나한텐 사랑이 일등이야, 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걔한테는 애인이 있고 나한테는 없는 점이 이제 와서 빡친다.
--- p.62, 「사랑만이 살길이다 2.0」 중에서
거의 동시에 내가 떠올리는 장면은 2년 전 겨울 철원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쓰던 침대, 그 위에 사지를 짐승처럼 세워 엎드린 채로 심호흡을 하며 울고 있는 나, 의 모습이다. 바로 지금 똑같이 울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그럴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상한 말인데 실로 그렇다.
--- p.84, 「조졌죠?」 중에서
끝까지만 쓰면 이 소설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쓰고 나면 나는 오랫동안 이 소설을 쓴 사람으로 기억될 거다. 끝까지만 쓰면……
이런 생각도 동기부여로는 적절하지 않다.
내가 이 소설을 쓰기에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 p.130, 「난 슬플 때 목욕을 해」 중에서
죽기 너무 좋은 도시였다. 외백도교는 그다지 안전장치도 없어서 그냥 포강을 향해 넘어지면 죽을 수 있을 거였다. 만약 구출된다고 해도 강물이 구정물이라 병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식의 충동이 들 때마다 나를 살린 건 막 나를 사랑하는…… 나를 필요로 하는…… 뭐 그런 존재들에 대한 생각보다는(그런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죽음의 감정적 동기로 지금 이건 좀 사소하지 않을까 하는…… 자존심 같은 거였다. 그걸 생각하니 스스로가 더 하찮으면서도 친밀하게 느껴졌다.
‘으이구 등신아ㅎㅎ’ 하는 마음.
--- p.251, 「상하이 여행기, ‘넷째 날’」 중에서
“감독님이 한 답변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007〉 시리즈가 수백 편 만들어질 동안 그런 질문 듣는 거 본 적 있냐고. 여자들한테도 이런 게 하나 있을 만하다고. 여성이 주인공인 오락성 있는 서사물이 수백 수천 편 만들어져도 괜찮다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제가 여성 서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그와 비슷해요.”
--- p.309, 「비바 엘리자베스 뱅크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