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약국을 열었을 때 맞췄던 흰 가운이 조금 탁해졌듯, 내 심장에 콱 박혔던 그 메시지도 조금 느슨해졌을 수 있다. 그래도 언제나 대문을 나설 때면 살짝 놓았던 비타민을 다시 그러잡는, 저 집념 강한 아이처럼 한 번 더 마음가짐을 바로잡고는 한다.
---「나의 약국 이야기」중에서
그래도 눈이 오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친구를 부르지 않아 고민 없이 약국에서 일했더라면, 약사 일을 지금처럼 오래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고민은 또 다른 흔들림을 마주할 때 비로소 그 정체가 밝혀지곤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 어두워져 갔던 나는 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서야 가까스로 제 목적지를, 아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만약 눈이 오지 않았더라면」중에서
‘상대방이 원하는 말은?’이란 물음에는 답변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하는 말은?’이란 질문에는 대답하기 힘들다. 원하는 말과 할 수밖에 없는 말 사이에는 나와 너의 관계와 감정, 입장과 이해라는 무수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 약도 마찬가지다. 같은 약이라도 사람마다 약효가 다르게 나타나고, 약의 가짓수가 추가되면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약사는 약장수가 아니기에」중에서
살면서 모든 믿음에 보답해 오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안 봤는데’라는 실망감을 안겨줬을 수도 있다. 실은 모든 믿음을 안은 채 놓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유리병 속에서 미약한 빛이나마 흔들 수 있다는 게 좋다.
---「라포르, 믿을 수 있는」중에서
물론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한다면 그것만큼 혈압을 높이는 원인도 없다. 그래도 그런 상황이 아니라 타인의 용서 앞에 내가 입을 열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언제나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고 싶다. 추운 겨울, 밖에서 눈사람이 되어버린 이의 어깨에 올려주는 외투 같은 말, 두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프지 않게 들어온 주삿바늘 같은 말.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중에서
불량식품을 달고 살던 나는 불량의약품이라면 치를 떠는 약사가 되었다. 간직했던 걸 잃어버린다는 건 언제나 사람을 조금 슬프게 하지만, 불량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약사는 뭔가 이상하니 아쉬움은 뒤로하기로 한다. 그래도 잃어버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학교와 병원을 거쳐, 약국에 오기까지 내겐 수많은 단어들의 새로운 뜻이 생겼다. 약은 물론이고 책임이라든가 도덕 혹은 돈이라는 단어에 이르기까지 선망의 장소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새로운 단어의 뜻들을 손에 넣게 되었다.
---「‘불량’이라는 글자」중에서
특히 말해줄 것, 상대가 미리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면 먼저 말해주는 게 중요하다. 이미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사람에게 “어이구, 거긴 넘어지기 쉬운데 조심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조롱밖에 되지 않는다. 그 말이 필요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말해주는 일은 “나는 당신을 이렇게나 생각합니다”라는 메시지와 같다.
---「말하지 않아도 아나요」중에서
“근데 오빠, 여기 딸기약 들어있어?”
큰일이다. 어떻게 하지….
“응, 있으니까 걱정 마. 그렇죠, 선생님?”
아뿔싸. 가만히 있던 내게 공이 넘어왔다. 순간 약사윤리강령 5조를 준수해서 진실만을 말할 것인지, 아니면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거짓말을 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애초에 없는 걸 있다고 하면 나중에 뒷감당은 어떻게 하지?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환자의 어떤 질문에도 대답까지 3초를 넘기면 안 된다. 망설이는 약사는 환자에게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사실 다 알고 있거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