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간 ‘한·일 고대관계’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필자는 많은 시간과 여러 곳을 탐방한 바가 있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무한한 감동과 희열(喜悅)을 느끼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러한 희열과 감동을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심정에서 붓을 들게 된 것이다.
필자는 3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국 국보 제2호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명문(銘文)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명문48자의 양각 속에는 제작자인 「斯麻사마」의 이름과 「大王年대왕년」, 「男弟王남제왕」과 같은 한시대의 ‘정치체제’를 확인할 수 있는 글귀가 있어, 나는 이글을 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왜냐하면, 이 거울의 제작자인 「斯麻」는 백제 무령왕(武寧王)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학계는 이 「斯麻」를 그저 「男弟王」의 신하(臣下)로 만들어, 「大王年」을 「男弟王」의 연호라고 해, 이 거울은 신하인 「斯麻」가 「男弟王」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으로서 주객(主客)이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일본학계의 이러한 해석은 '저의'가 있는 것으로서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의 관행은 백제나 倭에서는 鏡경?거울이나 大刀대도, 구슬 등은 언제나 윗사람이 아래 것들에게 하사하는 신임의 증표인 것이다. 필자가 한·일 고대관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거울에서 보는 「大王年·癸未年」는 당시의 백제왕의 연호이며, 이것이야말로 필자에게는 어두운 밤하늘과 같은 역사탐방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나 우리사회의 '백제'에 대한 인식은 고정관념 때문에, 한·일 고대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일본 측은 『일본서기』 신공기(神功記)와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설을 맹신하고 있으며, 따라서 銘文명문에 대한 해석은 자연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있어서도 학계는 『삼국사기』를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 백제는 삼국 중 왜소한 나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530년경에 제작된 남조의 『梁職貢圖양직공도』에 의하면, 백제는 晉末진말에 遼西郡요서군과 晉平縣진평현을 영유하고, 거기에 百濟郡백제군을 설치했다고 하며, 본국에는 「반파·사라斯羅· 新羅의 古名」 등 9개국을 「방소국旁小國」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학계나 사회에서는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학계나 사회에서도 『양직공도』에 대한 신빙성을 부정하고, 그것은 백제가 외교적으로 능숙하기 때문에 중국 측 기록은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한다.
그동안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한반도 3국의 왕의 서거를 모두 「薨(훙)」자로 표기하고 있으나, 1971년 무령왕릉 출토의 誌石지석에서는 王무령왕의 죽음에 「崩(붕)」자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본국보 2호인 「인물화상경」에서는 王무령왕의 '年代년대'를 「大王年?癸未年」이라고 했다.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백제사 해석의 운신의 폭을 크게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수년 전에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바도 없으며, 또한 들은 일도 없는 「廣西壯族自治區광서장족자치구」의 구도區都인 南?市남령시 근교에 있는「廣西 百濟鄕面?광서 백제향면」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지방의 주민장족·壯族들은 「百濟鄕」의 중심지인 「百濟墟백제허」를 가리켜「Daejbakcae·대박체·大百濟」라고 발음하는 것이다. 「百濟墟」의 「墟유적지」자가 있다는 것은 「大百濟」가 실재로 이 땅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大百濟」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는 숨 쉬고 있는 것이다.
---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