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가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런 수줍고 소심한 성격은 줄곧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아무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에 처하게 되면, 사람 얼굴 보는 것이 거북해서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려고 사람을 피하게 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겐,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극심한 이기주의 같은 것은 없었다. 언제나 나 자신의 문제에 골몰해 있었지만 막상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나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떤 감정의 욕구를 품고 있었다.
--- pp.18~19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모호하고도 복잡한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붙잡을 수 없는 수많은 인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말은 언제나 조잡하고 또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런 감정을 뭐라고 지칭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감정을 어떤 것이라고 규정짓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다.
--- p.27
그녀의 슬픔과 맥 빠진 표정은 어느덧 사라졌다. 자기 때문에 내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은근한 기쁨을 더 이상 감추거나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식탁에서 일어설 무렵에는, 우리의 마음은 이제껏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객실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보다시피 저의 모든 것은 부인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부인께서는 저를 고통에 빠뜨리면서 즐거워하시는 겁니까?”
--- p.43
“어떻게 되든 당신은 곧 떠나겠죠. 그러나 미리부터 그때를 생각하진 마세요. 그리고 나 때문에 걱정하지도 마세요. 하루 한 시간이 나에겐 아까워요. 당신이 떠날 때까지, 순간순간이 나에겐 소중하고 필요해요. 아돌프, 나는 어쩌면 당신 품에 안겨서 죽을지 몰라요. 왠지 그런 예감이 들어요.”
우리는 이렇게, 이전과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게, 엘레노르는 여전히 슬프게, P 백작은 여전히 우울하게.
마침내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는 당신 곁으로 돌아올 것을 나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 p.63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 관능에 몸을 떨고 무아지경에 도취되며 모든 이해타산과 의무를 망각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이제는 느낄 수가 없어요.”
--- p.94
우리는 불편한 관계 속에서나마 언제나 함께 있어왔고, 온갖 사건을 함께 겪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고받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까지 추억과 연결되어, 밤의 어둠 속을 스치고 사라지는 번갯불처럼 우리를 문득문득 과거로 데리고 돌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풀어주는 애잔한 감동에 잠기게 했다. 말하자면 우리는 마음속에 묻혀 있는 추억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추억은, 이별을 생각하면 괴로움을 안겨줄 만큼 강렬하게 나타났으나, 함께 있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기엔 너무 약했다.
--- p.101
이런 게 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나 자신을 달랬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사실은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나는 자책하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가 걱정하며 괴로워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말에 올라탔다. 우리는 말을 재촉하여, 엘레노르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땅을 급히 달려갔다.
--- p.117
“알았어요. 그만둘게요. 하지만 사랑하는 아돌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셔야 해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내가 챙겨둔 서류 속에 당신에게 쓴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어요. 그걸 꼭 찾아주세요. 나중에라도 찾게 되면, 부디 읽지 말고 태워버리세요. 우리가 그동안 나누었던 사랑의 이름으로, 당신이 보살펴준 이 마지막 순간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부탁할게요.”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 p.149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고뇌입니다. 아무리 교묘한 형이상학도 자기를 사랑한 여자의 마음을 짓밟는 남자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해명할 수만 있으면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있다고 믿는 그 자만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말하면서도 실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해 있고, 자신을 이야기하는 의도 속에는 남의 동정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흑심을 숨기고 있으며, 파멸의 한복판에 태연히 서 있으면서도 뉘우치기는커녕 제 자신을 이리저리 따지려 드는 그 허영심을 나는 증오합니다.
---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