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지지 않아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요술이라도 부리는 건가요? 그동안 어디서 뭘 하셨어요?”
“……우주선을 타고 외계를 다녀왔지요.”
민우가 흰 이를 보이면서 웃었다.
“해왕성, 명왕성, 천왕성…… 먼 별나라를 다녀왔어요. 방금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 p.53
그래. 내가 돌아갈 곳은 단 한 곳뿐이다. 그렇다. 그곳만이 내 고향이다. 다혜가 있는 곳이 내 갈 곳이 아니며, 현태를 찾아 어머니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은 틀렸다. 이미 모든 것은 늦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닌가. 민우는 떨리는 손으로 막 가져다놓은 커피잔을 들어 단숨에 커피를 비웠다.
--- p.137
“내 할 일은 다했다.”
현태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그녀가 아파서 함께 민우를 만나러 떠날 수 있건 없건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난 내가 해야 할 도리는 다했다. 이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그것은 다혜, 자신의 몫이다.
--- p.194
민우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아름답던 얼굴은 볕에 그을려 거칠었고, 맑던 눈동자도 이제 흐렸다. 당당하던 태도와 고귀하고 순결하던 그의 영혼은 삶에 지쳐 때가 묻어 있었다. 다혜는 민우의 얼굴을 보았으나, 민우는 다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혜의 얼굴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인 듯이. 눈부신 모습을 보면 눈이 멀어 피하려는 듯이.
--- p.214
“무엇을 어떻게 시작하겠단 말인가?”
현태가 냉정한 눈으로 민우를 쏘아보았다.
“세상이 네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멈춰주리라 생각하나, 피리 부는 소년? 달리는 열차도 네가 원하면 역도 아닌 곳에서 멈춰주리라 생각하나? 이미 늦었어, 피리 부는 소년. (중략)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민우, 네게는 술과 나태와 향락에 빠졌던 세월의 때가 묻어 있어. 다혜 씨도 마찬가지야.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하리라 생각하는가? 그녀는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기다렸다 나타나주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 p.261
옛 친구의 기억은 바쁜 일상의 생활에서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떠오를 때가 있어도 그는 아득히 먼 세계에 살고 있는 타인에 불과했다. 그것은 아내 다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민우는 다혜의 첫사랑이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것이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도 가슴 아픈 번민으로 남아 있을 리는 만무했다. 아주 먼 과거의 일이었으므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의 일이었으므로, 그저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환상과 같은 것이었다.
--- p.307~308
아득히 먼 대학 시절, 그날도 오늘처럼 따뜻한 봄날이었다. 문과대학 옆 비탈길에서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남학생과 부딪쳐 넘어졌지. 그때 부딪친 사람이 이 무덤 속에 누워 있다. 이미 탈골되어 한 줌의 뼈가 되어서. 그때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그 젊고 아름답던 청년은 어디에 갔는가? 그 청년의 흔적을 이 무덤 속에서 찾을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잠시 하늘에 떠가는 구름이 한순간 저희들끼리 어우러져 만들었던 하나의 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 p.32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