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삶으로 드러난다. 삶의 모습은 그가 무엇을 믿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지탄을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참된 믿음이란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믿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허무하며 거짓된 믿음이다. 구원이 결여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관계적 믿음, 또 하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관계적 믿음이란 사람 사이의 믿음(Faith in people)을 말한다. 믿음 은 단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모든 이들의 삶의 밑바탕에는 믿음이 있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 사이, 동료 사이 등 모든 만남과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믿음이다. 이러한 ‘관계적 믿음’을 다른 말로 ‘신뢰’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최고의 믿음, 최고의 신뢰를 표현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그 사람 말이면 다 믿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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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쁨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고 한없이 기뻐하시는 분이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보고 기뻐하듯이 주님께서도 우리를 보고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일곱 번 말씀하신 것이 바로 ‘좋았다(토브)’이다. It was good! 히브리어 토브는 형용사로 선함, 위대한, 놀라운(욥 37:14), 완벽한(신 32:4), 아름다운(전 3:11) 등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위대하며 놀랍고 완벽하였으며 좋지 못한 것(로 토브)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아름다움이었다. 모든 창조를 마치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심히 좋았더라(토드 메오드)고 기록하고 있다(창 1:31). It was very good! 심히 좋았다는 것은 창조의 위대함과 합목적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심히 좋았다는 것을 심미적(審美的)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기쁨으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늘 기쁨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바로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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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삶은 지나간 시간의 결과로 축적된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예수의 믿음으로 반응하고 좇아가는 삶이 축적되어서 미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믿음을 따라 살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촉구한다.
나는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믿음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섭섭해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좇아갈 때에 풍성한 삶이 주어질 것이다. 매일 내 생각이나 고집을 따라서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따라 나서자! 그러면 내 믿음은 예수의 믿음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예수의 믿음이 내 안에 놀라운 회복과 기적을 가져올 것이다.
예수의 믿음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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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에 주신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왕의 술 맡은 관원에서 유다의 총독으로 세우신 것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느헤미야의 마음이 그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품고 있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 곧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불타버린 성문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쓰임 받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왕이요, 대통령이요, 권력자요,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들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히 그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주인공일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만일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서 자신의 안위만 도모하였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주신 대로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였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그 무엇대로 행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 p.168-169
느헤미야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요, 복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할 만한 삶이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영육 간의 은혜와 복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대로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 기억대로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만약 기억해 주실 만한 선한 행위가 나에게 없다면 부끄러워하고 회개해야 한다. 회개의 자리가 없는 성도, 회개할 줄 모르는 신앙이란 이미 심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삶을 기억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Coram Deo(하나님 앞에서)’의 의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 경건하고 겸손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 수가 있다.
--- p.263-264
법궤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한다. 그 법궤 안에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을 담은 돌판이 있었다. 이 돌판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써 주신 유일한 문자다. 그것은 율법의 상징, 말씀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다. 만나는 거둔 지 하루가 지나면 벌레가 생기고 썩었지만 유일하게 법궤 안에 둔 그 항아리 안의 만나는 썩지 않았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도 그 싹이 여전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여호와의 영광이 있는 곳에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임하는 줄 믿는다!
--- p.276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면 예배당 밖에서, 즉 삶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즐겁기 때문에 동행하는 것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창 5:22). 에녹은 65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인을 받았다. 65세까지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삶을 보시고 심판하시는구나!’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의 증손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그는 의인이었으며(창 6:8)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창 6:9).
우리가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말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입술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은혜 받은 것이 아니다. 에녹과 노아는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 수천 년 전의 선조들이었다. 그들 모두 성전과 상관없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 p.314-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