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만덕산 초당에 드시어 호를 다산이라 하시고, 손수 구증구포 제다를 하시어 홀로 외로이 귀양살이의 한을 차로 삭이시면서, 누구보다 민생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시어 부단의 학문 연구 및 불후의 명작 『주역사전(周易四箋)』 편찬 등 기록적인 저술 활동을 하셨습니다. 선생님과 저희에게 차는 무엇인지요?
= 야생 차나무가 우거진 만덕산은 그야말로 내가 꿈에 그리던 다산이었네. 차를 하는 이들은 대밭 곁을 지나다가도 혹시 차나무가 있는지 들여다보지 않던가. 차를 마시면 흥(興)하고 술을 마시면 망(忘)한다는 말이 있네. 비록 외세에 의존한 통일이었지만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화랑이라는 통일 주도세력이 있었고, 화랑은 명산대천에서 웅혼한 자연의 기운을 심신연마 질료로서 얻고자 그 매체로서 차를 마시며 수양다도를 실천했다는 점이네.
차는 심신을 깨우고 술은 심신을 몽롱하게 하네. 차에는 다신이 들어 있어서 우리를 우주 만물과 이어 주고 하나되게 한다네. 술에는 주신이 들어 있어서 마음의 겉옷을 잠시 내리게 하여 우리의 알몸을 언뜻 되돌아보게 하는 마력이 있지. 나는 귀양살이로 허약해진 심신을 북돋우고자 애써 차를 벗하였네. 차를 마시면 신체에 활력이 돋고 더불어 정신이 맑아지며, 나의 존재와 자연의 이치를 여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자연의 섭리에 나를 순응하도록 인도하는 힘이 있네. 그렇게 하는 차의 공능(功能)인 다신을 후인들은 차의 성분에 따른 효능이라 할 테지.
술이나 후대들이 마시는 커피 · 보이차처럼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음료를 마셔서 얻게 되는 찰나적 행복감보다는, 조상들이 누려 온 전통 녹차를 마셔서 신토불이 원리에 따라 자연의 섭리 및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됨으로써 깊고 길게 얻게 되는 참 즐거움이 진정한 행복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차, 특히 녹차는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심신건강 수양음료라 하는 게 마땅하네만….
--- p.11~12
한국 전통차와 전통 차문화의 정체성 상실이 한국 차농과 차산업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국면에서 강진 전통차의 정체성 탐구는 곧 한국 전통차의 원형 복원과 계승을 위한 핵심 작업이자 한국 차의 위기 돌파를 위한 대안 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강진 유배기에 자신의 호를 茶山이라 짓고 다산초당에 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도한 강진 전통차 제다는 이전의 중국 제다의 이론을 섭렵한 후 『부풍향차보』와 『기다』에 기록된 한국 전래 제다의 다양성을 취합하고, 여기에 실학적 발명가 다산 특유의 독창성을 가미하여 한국적 전통 제다의 원형을 창시한 것이었다. 다산이 다산초당 시절과 해배 이후 창안해 낸 창의적이고 다양한 제다법과 차 종류 및 특성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제다사나 차문화사에 없었던 것이다.
--- p.136
‘다신’의 정체와 ‘신묘’의 원리를 상술(詳述)하여 정리하자면, 다신은 차에 들어 있는 기(氣)가 최고로 활성화된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차의 기는 향과 색, 그리고 그것들의 융합적 양태인 맛(氣味)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차의 향은 가장 뚜렷이 기화(氣化)되어 다자간 공유의 소통 매개체 역할을 하고 다도수양에서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되어 ‘신묘’의 기능을 한다. 초의는 이 차향 또는 차향을 발현시키는 차향의 성분요인을 ‘다신’이라고 본 것이다. ‘신묘’를 ‘기가 활성화되어 우주만물과 통하는 작동 양태 또는 그 원리’라고 볼 때 그런 역할을 하는 차의 향이 다신이다.
즉, 한재가 볼 때 차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형태(精 · 氣)의 차로 우리 몸에 음다되어 우리의 마음의 감수활동에 의해서 정신적 단계인 신(다신)으로 활성화(고도화)되어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가 된 것이다. 이러한 다신의 ‘신묘’ 기능이란 『주역(周易)』의 설시(?蓍) 원리와도 같은 것으로서 우주 생명에너지(생명, 생명력)의 역동적 동시성의 편재(遍在)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 p.155~156
모름지기 차란 무엇인가, 왜 차를 마시는가, 좋은 차란 어떤 차이며 그 본질은 무엇인가, 이욱 원장과 위 프로젝트 추진팀의 바람대로 어떻게 전통차의 장점을 살려 대표적 기호식품의 입지를 마련하느냐 등등을 생각할 때, 전통제다에 관한 전문 지식을 기반으로 오늘날 한국 차가 처한 현실을 면밀히 분석해 봐야 할 것이다.
이욱 원장의 진단이 아니더라도 한국 차는 지금 서양 커피와 중국 보이차에 밀려 질식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한국 차가 커피와 보이차에 밀리는 원인을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닌가. 이욱 원장은 이번 학술대회 개최 목적 중 하나가 “한국 전통차가 커피와 같은 수입차에 밀리는 이유와 그 대책을 발표한다.”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커피가 (수입)차도 아닐뿐더러 학술대회 발표문 어디에도 전통차가 그 (수입)차에 밀리는 이유와 대책은 없었다. 이욱 원장과 프로젝트 담당팀이 문제는 인지하고 있으나 아직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커피의 특징은 쓰고 강한 맛과 향이다. 보이차의 특징은 초가지붕 ‘썩은새’ 비슷한 독특한 냄새와 “녹차는 냉하고 보이차는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는 근거 없는 선전문구의 덕을 본다는 것이다. 즉, 커피와 보이차가 한국 전통차를 누르는 원인 또는 특성은 강한 ‘기호성’과 그것을 활용한 선전문구이다. 사람들이 녹차는 쓰고 떫어서 싫다고 하면서도 녹차보다 훨씬 쓴맛이 강한 아메리카노와 같은 커피에 쏠리고, 녹차의 꽃다운 진향(眞香, 芳香)과는 퍽 다른 냄새가 나는 보이차를 맹종하는 데서는 맛에 대한 이중성 안에 도사린 맹목적 유행 좇기 성향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통차 진작을 위해서는 커피나 보이차와 같은 ‘기호음료’가 아닌 ‘심신건강 수양음료’로서의 녹차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그것이 녹차 유행의 단서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욱 원장이 “전통차의 장점을 살려 대표적 기호식품의 입지를 마련하겠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전통차가 커피와 보이차에 밀리는 원인이 전통차를 ‘기호식품’ 수준으로 격하시켜 경쟁에서 낙오되게 한 것인데, 전통차의 ‘기호식품으로서 입지’를 마련하겠는 것은 전통차의 무덤을 더 깊이 파겠다는 일이 아닐까?
--- p.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