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반 배경
당시 조선의 소학교 제도에 성적이 좋은 학생은 1학년 또는 2학년을 월반할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소학교 시절 저는 성적이 좋아 월반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경성에 있는 숙명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반에서 가장 키가 작고 나이도 제일 어렸습니다.
몰락의 이유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 사람 좋은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져서 빚보증을 서거나 누군가의 간사한 계책으로 인해 토지 매매가 실패하면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람이 너무 좋고 물러서 온 가족이 괴로운 일을 겪은 것이다, 라고 말해 버리면 아주 간단하게 생각될 일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간단한 생각만으로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당시 복잡한 사회 흐름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경제 기구는 유한(有閑), 유산(有産)이 있던 낡은 생활을 근본부터 붕괴시켜 버리는 시대가 그때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습니다. 이런 무서운 시대의 폭풍우 같은 날들로 인해, 우리 가족은 허무하게도 다른 계급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함께 휘말려 버렸던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꿈꾸다
생활이, 사회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불가사의하게도 그에 반해 ‘아름다운 것’, ‘정결한 것’, ‘강한 것’을 동경하는 마음이 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뿌리 깊게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영향
오빠의 영향을 받은 저는 들뜬 생활을 하는 대신 시와 소설을 마치 탐하듯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시나 소설의 달콤한 꿈처럼 은밀하고 얕은 이야기와 덧없는 내용은 제 마음에 그 어떤 울림이나 감동도 주지 못했습니다. 현실 속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거 같은, 그리고 생활 의식을 확실하게 깊이 뿌리내린 작품을 구해서 애독했습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와 노래에 빠져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시절의 일을 생각해 보면 서서히 그립고 애틋한 마음이 가슴 가득 복받쳐옵니다.
사명감
나는 조선을 대표해서 내 조국의 전통과 풍물이 가진 미를 제대로 잘 살려 현대에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보자. 그렇게 해야 한다. 나에게는 이것을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 나는 큰 사명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독립
예술에 대한 첫 번째 전환기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언제부터인가 막연하게 무용에 대한 관념이 제 마음속에서 변화해 갔습니다.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은 선생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정진해 가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이 매너리즘을 타파해 더욱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라는, 독자적인 입장에 대한 자각도 드디어 싹트기 시작해, ‘내가 아니라면 안 되는 새로운 무용을 창작해 보고 싶다, 나 자신은 그런 예술을 창작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안막의 이름
안필승은 ‘안필승’이라고 하는 이름보다도 ‘안막’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됐습니다. 나중에 이시이 선생님의 이름을 무단으로 빌려 써서 괘씸하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안막이라는 이름은 자신이 만든 이름이 아니고 집필하고 있던 신문사가 멋대로 붙여준 ‘펜 네임’이었고 그 이름이 일반적으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됐습니다.
안막의 영향
결혼 이후 저는 남편 안막의 영향을 크게 받아 작품에도 그것이 강하고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 전 다쿠보쿠와 도스토옙스키 등을 열렬히 사랑해 평소에 읊조리거나 흥얼거리던 제가, 뭔가 마음 깊은 곳 어딘가를 울리는 것을 찾아 ‘인디안 라멘토’의 음악으로 처녀작을 만들고 나서, 결혼 후 이것이 시류와 보조를 맞춰 경향적으로 진보하여 〈해방된 사람〉, 〈빛을 구하는 사람〉, 〈태양을 구하는 사람〉 등 다소 의식적인 내용을 공연했으며, 그것이 차차 남편의 구속 등으로 인한 저 자신의 환경 변화와 맞물려 제 작품 경향이 바뀌어 갔습니다. 무엇보다도 관객층과 가능하면 가까이 접근해 손을 마주잡는 것, 조선 관객층의 심장이 고동치는 것과 딱 합치하는 것, 거친 생활의 파도에 마구 떠밀려 터벅터벅 이민하는 무리, 그런 것에 대해 저는 격하게 공감하며 이것을 무용화해 보자는 욕망에 휘말렸습니다.
출세작 〈에헤야 노아라〉의 창작 배경
훗날 이시이 바쿠(石井漠) 선생님의 작품 발표회에서 “직접 만든 작품을 하나 발표해 보지 않겠는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공연을 하는 김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조선무용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예술적으로 재탄생시키고 싶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무용가로서 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싶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이야기한 ‘굿거리장단 춤’은 현재에도 중요한 제 상연 목록(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아버지가 추었던 ‘굿거리장단 춤’을 즐기며 바라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탄생한 것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
저는 동양인이 춤추는 서양 무용에 한해서는 그 거리를 좁히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두 개의 다른 무용도 통일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다른 두 영역의 무용을 저 자신만의 레퍼토리로 엮어 춤을 추는 제게는 더욱더 무용의 통일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며 또한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구미공연
북미·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독일·브라질·우루과이·아르헨티나·칠레·페루·에콰도르·콜롬비아·코스타리카·멕시코 등을 거치면서 150회가량의 무용 공연을 거듭했으며, 10만 마일 남짓 긴 여행길이 되었습니다. 3년이라는 세월이 길지는 않지만 결코 짧지도 않았습니다.
중국무용을 탐구한 이유
나는 바쁜 공연 중에 반드시 동양무용의 신작 소재를 찾고 싶다는 생각으로 극과 곤곡, 영화 및 연극 등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중국 의상과 관련된 참고서와 음악, 그리고 중국 시문에 나오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 향비 등의 문헌을 연구하면서 중국 여성의 예술화된 여러 가지 전형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