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관계 속에서 해석된다. 단어 하나로 사람의 하루를 기분 좋게 할 수도 있고 나락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눈동자 바로 앞에 뾰족한 무언가 세워져 있는 것처럼 온몸에 신경의 날을 세우기도 한다. 때로는 늘어난 고무줄처럼 느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언어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모양이 변하고 온도가 바뀐다. 심지어 권력이 생기고 위계가 정해지기도 한다.
봄볕처럼 따뜻하고 이불속처럼 편안한 단어들이 있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잘될 거야’ 등이다. 미로같이 풀리지 않는 문제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닥칠 때 ‘괜찮아’ 한마디를 들으면 불편했던 감정들이 순식간 녹아든다. 어깨를 토닥거려주는 행동보다 말이 가지는 온기가 때로는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감정의 변화도 사용하는 언어에 나타난다. 사람들이 쓰는 ‘우리’라는 단어는 가족으로서, 연인으로서 정체성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감정의 골이 생기거나 사이가 불편해지면 ‘우리’는 사라지고 ‘나’와 ‘너’로 중심 이동이 이루어진다. 언어의 무게 중심이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한 단어가 복잡한 설명을 짊어지기도 한다. 치대기, 세탁하기, 널기, 개비기, 옷장에 넣기 등 다양한 과정을 ‘빨래’가 대변한다. 여러 과정의 동사는 쏙 빠지고 ‘빨래’라는 명사 하나에 전 과정이 담긴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이 큰 단어인 셈이다.
‘이유 없는, 보람 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헛’이라는 글자가 있다. ‘헛하다’의 어근이다. 반듯하고 튼실한 뜻을 가진 단어도 이 한 글자가 더해지면 볼품없고 빈약하다는 의미로 전락한다. 씨름판의 들배지기 기술처럼 멀쩡한 뜻을 가진 단어를 보기 좋게 엎어치기 해서 힘을 빼놓는 것이다. 헛방, 헛팔매질, 헛깨비, 헛걸음,헛세월, 헛고생처럼 헛이 붙은 단어를 나열하면 끝이 없다. 하지만 참되지 못한 의미의 ‘헛’에 당한 단어들이 마냥 속절없이 기죽을 수만 없어 변신을 시도한다. 살기 위해 스스로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헛’이란 접두어는 생명과 관련되기도 한다. 여자의 임신 여부는 정확한 검사를 통해서 알게 되지만, 헛구역질을 통해서 미리 눈치챈다. 헛구역질은 소중한 생명의 잉태를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임산부를 보호받게 하는 신이 내린 신호로 여겨진다. 엄마 배 속의 아기는 밤이고 낮이고 헛발질을 해 자신의 건강한 몸 상태를 전한다. 수없는 헛발질을 통해 아기는 자라고, 헛구역질 하는 엄마와 친숙한 교감까지 이루어낸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헛’이라는 단어가 가장 고귀한 생명을 품고 지켜낸다. 태초의 소통으로 이어지는 몸 말인 헛구역질, 헛발질이 얼마나 숭고한가.
옛날 농가에는 헛간이 있다. 안채에서 조금 떨어지거나, 대문간 가까운 곳에 있다. 한 면은 벽 없이 트인 허름하게 지어진 집이다. 변소가 달려있기도 하고 각종 농기구, 거름, 재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인다. 이곳은 주인도 드나들지만, 용무가 급한 이웃이 볼일을 봐도 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주인의 허락 없이 빌려다 사용해도 무방하다. 헛간은 넉넉한 인심을 채워 놓은 바깥채인 셈이다.
꽃에도 헛꽃이 있다. 자드락길에서 만나는 산수국의 황홀경에 눈길을 빼앗겨 본 사람은 안다. 여러 장의 헛꽃잎이 유혹하는 자태가 얼마나 고혹적인지. 산수국은 헛꽃을 내세워 작디작은 진짜 꽃에 곤충이 찾아 들게 한다. 스스로는 열매조차 맺지 못하지만, 헛꽃이 벌과 나비를 유인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참꽃이 수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된다. 누가 헛꽃을 꽃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추운 겨울이 와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말라비틀어진 자태에서 의연한 절개마저 느낀다. 헛꽃이라 헛것이 아니다.
결혼 초에 아이들을 내 손으로 키우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십 년 동안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그 일마저 놓았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이십여 년 봉사활동을 꾸준히 했다. 다시 전문직으로 돌아가려니 십 년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의료 현장의 변화는 더 급격했다. 386시대의 구닥다리 지식으로 최첨단 시대 현장에 끼어들려니 두려움도 앞섰다. 미립나기로 비비고 들어갈 곳이 없었다. 젊고 유능한 전공자들이 배출되고 취업 현장의 경쟁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다.
이력서를 썼다. 여러 번 망설이다가 이력서 끝에 봉사활동 기록을 넣었다. 면접관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었다. “이렇게 오래 봉사활동을 하다니 선생님은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그동안의 헛수고가 ‘찐’ 수고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 줄의 ‘헛수고’ 기록이 면접관에겐 ‘헛방’이 아니라 ‘진짜 이력’으로 인정받아 취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믿는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에서 퇴직 나이가 지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세상 어디에도 헛수고는 없다. 헛수고, 그것도 수고다.
봄이면 눈길이 자연스럽게 수국에 꽂힌다. 수형이 근사한 바위수국을 샀다. 은은한 향기를 품고 헛꽃이 달린 연분홍 색감이 매혹적이다.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릴 수 없게 하는 헛꽃이 ‘헛’이라는 이름을 달아 더욱 애틋하다.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무엇을 위해 헛꽃을 피우고 있을까 싶다. 헛꽃을 수없이 피우다 보면 내 안의 참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겠지.
글 한 편을 쓰기 위해 참글인 양 헛글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한다. 헛헛한 글이 찐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오늘도 한 송이 헛꽃을 피웠다. ‘헛’이라는 다리를 건너 ‘참 나’ ‘참 글쓰기’에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까. ‘헛’이라는 글자를 씨간장처럼 귀하고 소중히 다루고 싶다.
---「헛」중에서
세상 만물은 본연의 색을 가진다. 땅속에 심은 검정 씨앗은 땅 위로 연초록 애순을 틔운다. 성장의 시기를 보내면서 연초록 싹은 초록 잎이 되고, 진초록 줄기는 억세지고 단단해진다. 짙어진 초록 껍질이 두꺼워져야 비로소 나무가 된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으며 생을 살아간다. 사람이든 나무든 옷을 입는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부터 몸을 가리기 시작했다. 몸을 가리는 행위는 곧 의복의 시대를 말하며 외적, 내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사람은 생활과 계절에 맞추어 옷의 종류를 나눈다. 몸을 가리는 단순한 기능이 있는가 하면 혹자는 명품이나 브랜드로 부를 치부하기도 한다. 옷은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색칠이다. 어떤 옷이라도 내 몸과 상황에 맞는 멋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새것이든 헌것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숲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새로운 지식을 얻는 행사가 흥미로웠다. 6월의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신록을 더욱 짙게 만들었고 숲속은 음영이 선명하게 구분되었다. 하늘에 닿기라도 할 듯 옹골차게 쭉쭉 뻗은 삼나무숲을 돌아 나왔다. 그 모퉁이에서 생각지도 않은 대나무 군락을 만났다.
온천지가 초록빛으로 가득 차오르는데 유독 누렇게 뜬 잎이 눈에 띄었다. 늘 푸른 기상이 성성한 초록의 대명사인 댓잎이 빛바래 가는 모습이라니. 검푸르게 일렁이는 대숲만 봐 오다 삭은 삼베 색으로 변한 잎이 의아하기만 하다. 영락없이 시들어 죽어간다고 여겨진다. 누군가 “대나무가 병이 들었나 봐요.” 하고 물었다. 수많은 대밭을 봐 왔는데 눈여겨보지 않아서일까. 해설사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의 사실을 알려줬다. 일순간 마른 댓잎이 가슴을 훑으며 바람 소리를 낸다.
씀바귀 냉이꽃이 피고, 모내기, 보리 베기가 끝나면 본격적인 초여름이 시작된다. 이때가 24절기 중의 하나인 소만小滿이다. 만물이 자라서 온 세상에 차오른다는 뜻을 지닌 절기이건만 찢어지게 배고픈 보릿고개 시기였다. 봄에 꽃피고 맺힌 열매가 드러나는 때로, 잎을 키우는 시기이다. 잎의 푸르름이 절정에 다다르고 힘 있게 뻗어나갈 즈음 죽순이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죽순은 원래 불칼같이 성질이 급한 것인지, 하늘빛이 궁금한 호기심 때문인지 하루가 다르게 쑥쑥 몰아쳐 자란다. 땅심을 얻어먹고 바람의 응원을 받아서일까 성장의 욕심이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 모태인 싱싱한 대나무의 영양분마저 모조리 빼앗아 먹고, 감당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자란다. ‘우후죽순’이란 표현이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다. 어린 죽순에 영양분을 다 빼앗긴 대나무의 잎이 가을 낙엽처럼 누렇게 마르고 뜨는 것을 ‘죽추’라 한다. 초록의 봄볕 아래 누렇게 변한 대나무 잎을 슬픈 ‘대나무의 가을’이라 일컫는다. 마치 새끼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하는 부모의 희생과 같다.
엄마가 자는 잠에 돌아가셨다.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도 잘 먹고, 노인정 화투판에서 이백사십 원을 땄다고 수다가 길었던 날 밤에 홀로 떠났다. ‘자는 잠에 데려가 주이소’를 되새김질처럼 읊조리던 기도가 하늘에 닿았나 보다. 엄마의 옷장을 열어보니 함초롬하게 정리해 둔 옷이 엄마의 삶처럼 단순하고 가지런하다. 엄마의 체취를 품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옷을 안고 아무리 울어도 엄마는 없다. 사진첩을 보듯 옷과 함께 딸려 오는 기억이 생생해질수록 죄스럽고 후회스럽다. 세월이 지나도 살아남은 빛바랜 헌 옷만 나와 함께 그렁그렁 눈물에 젖는다.
평생 새 옷을 모르고 살았던 엄마다. 칠 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죽추처럼 시들어갔다. 하룻밤 사이에도 훌쩍 자라는 죽순에게 자양분을 아낌없이 줘버린 대나무 같은 엄마의 삶이었다. 누렇게 바래어가는 모습에 생기를 넣고 빛을 주는 새 옷 한 벌 입혀드린 적 없는 낯부끄러운 죽순이 나였다. 여유가 있는 언니는 브랜드 옷을 종종 사줬다. 쳐다만 봐도 부티가 나고 화려한 옷이건만, 입기가 어색했을까. 아니면 두고두고 아끼고 싶었을까. 가격표도 떼지 않은 옷이 가지런히 옷장에 걸려 있었다.
엄마 생전의 일이다. 가욋돈이 많이 지출되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엄마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빈티지 가게를 찾았다. 어쩌다 새뜻한 옷이 눈에 띄면 헌 옷을 사는 부끄러운 죄책감이 사라졌다. 엄마에게 안성맞춤인 옷을 찾아내면 남이 먼저 채 갈까 봐 재빨리 계산하고 가방에 넣었다. 당신은 막내인 내가 사다 주는 옷이 어떤 옷보다 편하고 마음에 든다며 즐겨 입었다. 헌 옷인 줄 알지만, 흔쾌히 입어주었던 것은 딸내미의 형편을 헤아려 주는 엄마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그 후 빈티지 시장을 주저하지 않고 들어가 옷을 고르는 일이 잦아졌다.
사람은 떠난 자리가 간결해야 한다며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몇 안 되는 옷마저 하나둘 없앴다. 서랍장 두 칸에 엄마 삶을 지켜 준 옷이 전부 담겨 있었다. 새 옷은 하나도 없다. 주로 막내딸이 사다 준 옷을 입고 또 입어 더 헌 옷이 된 것들이다. 우중충하고 빛바래고 낡은 옷뿐이지만 그런 옷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개어져 있었다. 유품으로 물욕의 덧없음을 가르치고 가신 것일까.
계절의 색감을 담은 옷, 엄마가 유독 좋아한 꽃무늬 옷, 혹여 꿈길에 아버지가 보면 좋아하실 옷, 헌 옷이기에 더욱 사연과 추억을 담은 옷이다. 이제는 엄마가 남겨 놓은 바랜 옷마저 정리해야 한다. 쉽게 쓰고 버릴 것들을 보는 기분은 가볍고 금세 흩어지지만, 이야기와 시간이 담긴 물건은 묵직하게 다가와 오래 머문다.
낡고 허름한 옷이라도 의미를 두면 소중한 물건이 된다. 골동품이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듯이 빈티지 옷도 입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진다. 그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누군가에게 다른 이야기로 다가간다. 각자의 해석에 따라 주인의 애정을 담았던 옷은 빈티 나는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색을 발한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에게 이어지는 또 다른 옷의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친구 SNS에 눈에 익은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은 사람,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 옆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 또래 노인들을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이다. ‘어그부츠 신은 할머니 멋지다.’, ‘촌 할머니 의상이 도시삘이다.’, ‘모자도 잘 어울리는 할머니네.’ 등의 여러 댓글이 달려있다. 주인공은 엄마였다. 우리 칠 남매의 모죽母竹인 엄마가 밝게 웃고 서 있다. 아슴아슴하게 바라보니 겹겹이 시야가 흐려진다. 밝고 맑았던 우리 엄마는 어떤 색깔로 이 세상을 살다가 무슨 색으로 떠났을까. 제 몸속에 바람을 채우며 한결 푸르른 대숲이 일렁인다.
---「죽추竹秋」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