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아직도 코끝과 양볼에 내리쬐는 햇살을 느낄 수 있다. 그 간질간질한 따스함이 가슴속까지 스며 들어오면 심장이 녹아내릴 듯 평온해지면서 온몸에 활기와 자신감이 감돈다. 내가 기억하는 햇살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한 살 되던 때, 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해를 볼 수가 없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저 멀리 보이는 들판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천 개의 물방울이 되어 튀어오르는 빗물뿐이다. 여름도 없고 가을도 없고 겨울도 없다. 할아버지가 사계절 가운데서 여왕이라고 했던 봄도 당연히 없다. 심지어는 낮과 밤도 없다. 새벽이나 초저녁처럼 어스레한 시간이 영원히 계속된다. 산꼭대기의 희미한 빛 외에는 온통 어둠뿐이다. 잠자리에 들 시각과 일어나야 할 시각은 오로지 마을 광장의 시계탑을 보고 알아채야 한다. 나의 세상은 늘 어둡고 축축하다. 매일매일 비가 오고 구름이 낀 날이 이어지지만, 천둥이나 번개가 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날 만약 할아버지가 도시락을 가져갔더라면, 그래서 내가 할아버지의 온실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나의 세상은 아직도 영원한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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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껏 수도 없이 할아버지의 온실을 상상해 보곤 했다. 천장의 강렬한 불빛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채소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잔가지들, 바닥에 단단하게 자리한 나무들, 그리고 온 세상의 색이란 색을 모두 담은 듯한 갖가지 과일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것은 그동안 상상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처럼 가느다랗고 연약한 식물의 줄기들뿐이었다. 그 옛날 마을 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 때, 어렵사리 흙을 뚫고 나온 각종 식물의 싹들이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져 버렸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온실 출입문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곧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p.16~18
색색의 꽃으로 가득한 푸른 골짜기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앞을 가렸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골짜기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저 멀리 아득한 산꼭대기 위로 회색 하늘이 펼쳐져 있었지만, 키 큰 자작나무가 천장처럼 머리 위를 빽빽하게 덮고 있어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작나무 이파리들이 산들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거렸다. 발밑에는 푸르른 잔디와 예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식물 도감에서 보았던 갖가지 꽃들, 실제로는 볼 수 없으리라 믿었던 색색의 꽃들······. 나는 그 꽃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는 두어 송이를 꺾어 손에 쥐었다. “안녕, 카네이션? 안녕, 물망초······? 아, 너는 물망초가 아닌 것 같구나. 혹시 미나리꽃이니?”
--- p.51~53
나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축 늘어뜨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고는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울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조심하거라. 조심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할아버지 목소리가 꺼칠꺼칠하게 쉬어 있었다.
“네.”
“다락방에 상자가 있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물감통과 식물 도감, 그리고 식물 표본첩······. 너는 다락방에서 그것들을 자주 들여다보곤 했잖아.”
“네,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요······.”
“물론이지, 얼마든지 보고 사용해도 돼. 그럴수록 더 좋아.”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내 침대로 걸어간 후, 침대 발치에 차곡차곡 개어 놓은 나의 잠옷을 집어 들었다.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는 무릎에 내 잠옷을 얹어 놓고는 옷깃과 단추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 잠옷이 다락방의 상자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
나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