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패가 늬들 같은 남의 집 머슴보다는 낫지! 천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당패는 자기 가고 싶은 데로 갈 수는 있으니까.”
두치와 막개의 말을 어느 틈에 엿들었는지, 사당패 중 하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눈 밑에 흉터가 있고 턱이 뾰족했다.
어느 틈에 둥글게 선 사당패가 줄타기하려는지 장대를 높이 세우고 줄을 매었다. 장대 옆에는 두치만 한 아이가 발바닥을 연신 두드리며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두치는 작년에 보았던 줄타기 모습이 떠올랐다. 한 손에 부채를 쥐고 줄 위에서 춤을 추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새 같았다.
--- p.14
둘이 마주 보고 버들피리를 부니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버들피리 곡조가 폭포 소리에 흩어졌다.
“나랑 같이 면천하자. 우리 둘이 면천해서 사당패 따라가자!”
두치가 버들피리를 불다 말고 막개에게 말했다.
“싫다. 난 그냥 황 첨지네 노비로 살란다.”
막개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넌 종으로 사는 게 좋아?”
“그래.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배는 고파도 굶어 죽지는 않고, 지붕 밑에서 잘 수는 있잖아. 너나 면천해.”
“내가 면천해서 황 첨지네 집을 떠나면 그때 가서 부러워하지나 마라. 그런데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
두치가 막개에게 물었다.
“노비가 돈을 어떻게 벌어? 주인이 시키는 일 하기도 바쁜데.”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어떻게 해야 돈을 벌어?”
두치가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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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마당에서 황 첨지 목소리가 들렸다. 곰보 아재가 방으로 들어왔다.
“두치와 꼭지는 오늘부터 집 밖에 나가 있으라네.”
곰보 아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갑자기 왜?”
아버지가 곰보 아재에게 다가앉으며 물었다.
“두치 어미가 막내 도련님 젖을 먹이는데 혹시 옮을까 봐 그러는 거지.”
“도대체 애들끼리 어디에 가 있으라고?”
아버지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산 밑 움집에 가 있으래.”
“움집? 땅 파고 거적때기 얹어 놓은 동굴 같은 곳에? 거기서 애들이 어떻게 있어? 건강하지도 않은데!”
아버지가 이번에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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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꼭지는 하늘나라에서 배도 안 고프고, 아프지도 않을 거야.”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늘나라에 엄마랑 아버지, 나는 없잖아요. 꼭지 혼자 얼마나 무섭겠어요?”
아버지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 하늘나라에도 양반이랑 노비가 있을까요? 꼭지가 하늘나라에서도 노비는 아니겠지요?”
“두치야, 미안하다. 나 같은 천한 놈에게서 태어나서.”
아버지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나 꼭 면천할 거예요. 내 자식은 노비로 만들지 않을 거예요.”
두치가 주먹을 꼭 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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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치는 그날 저녁부터 눈에 보이는 대로 나무를 주워다 꽃을 만들었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아주 작은 나무 꽃을 만들기도 하고, 주먹만 한 것도 만들었다.
처음에 만든 꽃은 엄마에게 주었다. 주인집 막내는 아직 젖을 안 떼었는지 엄마 치마폭에서 떠나질 않았다.
두치는 안채 마당을 지나가던 엄마를 불러 세우고 나무 꽃을 내밀었다.
“웬 거야?”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꼭지가 죽은 이후로 엄마 얼굴이 핼쑥해지고 어두워졌다. 모처럼 웃는 엄마 얼굴을 보니 두치는 꽃을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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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아무도 두치가 파는 나무 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두치가 좌판을 벌인 곳까지 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포졸만 두어 번 왔다 갔다. 전립을 쓰고 방망이를 든 모습을 보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겁이 났다.
장이 파할 때가 되자, 두치는 한숨을 쉬었다.
“황 첨지에게 쇠꼴 베러 간다고 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허탕만 치네.”
막개도 풀이 죽었다.
“우리 아버지가 나무 꽃을 잘 팠는데.”
막 좌판을 접으려는데 두치 또래의 여자아이가 다가와 매화꽃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말했다. 아까부터 몇 번씩이나 주변을 왔다 갔다 하던 것을 봤다. 다가올 때마다 혹시 나무 꽃을 사려나 싶었지만, 모른 척하고 지나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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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이놈, 어디서 이걸 훔쳤느냐?”
황 첨지가 눈을 부릅뜨고 두치에게 물었다. 시퍼렇게 된 눈을 부릅뜨니 더 아픈지 손바닥을 얼굴에 대며 인상을 썼다.
“훔친 거 아니에요. 내가 번 거예요!”
두치는 억울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니가 뭘 해서 돈을 벌어?”
재현이가 황 첨지 옆에서 얄밉게 말했다.
“나무 조각으로 꽃을 만들어서…….”
두치는 뒷말을 삼켰다. 야바위판을 벌였다는 말을 했다가는 더 큰 일이 날 것 같았다.
“나무 조각은 주인 것이지, 그러니 나무 꽃도 주인 것이고, 그걸로 번 돈도 주인 것이다. 알겠느냐?”
황 첨지가 엽전을 챙기며 말했다.
“아니에요! 제 거예요.”
두치가 소리 질렀다.
“저놈이! 안 되겠다. 저런 놈이 도적이 되는 것이다! 너 오늘 잘 만났다. 애초에 버릇을 고쳐놔야지.”
--- p.72
두치가 자신이 억울한 듯 외쳤다. 얼마 전 자기가 번 돈을 황 첨지에게 빼앗기고, 아버지가 멍석말이 당한 게 다시 생각났다.
“군수가 누구 편이겠냐? 양반과 부자 편이겠지. 관아에 가면 황 첨지 편을 들고, 날 매질을 해서 내쫓을걸!”
두치 아버지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누가 우리 억울한 걸 풀어줘요?”
두치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우리 억울한 걸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임금님도 그렇고, 군수님도 마찬가지야. 우릴 위해 싸울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
막개 아버지가 이를 악물었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아침이 밝았을 때는 황 첨지네 광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 p.93
두치는 집으로 돌아가 가마솥 아궁이 앞으로 갔다.
막개가 그 앞에서 눈을 비비며 장작을 넣고 있었다. 그걸 보니 작년에 황 첨지네 머슴으로 새로 와서 가마솥 앞에 앉아 있던 곰보 아재가 생각났다.
“잘 있겠지? 곰보 아재?”
두치가 막개를 보고 말했다.
“아마 의적이나, 동학군이 되었을지도 몰라.”
막개가 안채 뒤로 보이는 뒷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치는 삽과 괭이를 든 동학군들이 손뼉을 치며 곰보 아재를 환영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그러면 두치도 사당패가 아니라 동학군들을 따라나설 것 같았다.
그러면 꼴도 보기 싫은 황 첨지와 재현이는 더 안 봐도 될 것이다.
--- p.100
두치가 막개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담장 뒤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름날…….”
“그렇게 빨리?”
“……없어져서, 그러다가 관군 손에라도 들어가면 큰일…….”
두치가 귀를 바짝 대고 들었지만 너무 작은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두치쪽으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급히 몸을 숨겼다.
조금 지나자 황 첨지네 집 뒤에서 사내 하나가 나왔다.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검고 삐쩍 말랐다. 그 사람도 막개 아버지처럼 주변을 살피며 걷다가 마을을 빠져나갔다.
--- p.109
‘아버지 죽지 마세요. 꼭지처럼 죽으면 안 돼요.’
두치는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며칠이 지나도 황 첨지는 두치 아버지가 괜찮은지 보러도 오지 않았다.
“도련님을 살렸으니, 삼백 냥을 주세요.”
두치가 사랑 마당에서 황 첨지에게 말했다.
“너희가 재현이를 구하긴 했다만, 우리 집 노비가 한 일이니 돈을 줄 필요가 없다.”
“재현이 도련님을 살리는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거야 우리 집 노비 말고 다른 사람이 살려줬을 때 주겠다는 거였지.”
--- p.123
두치도 달집이 타는 걸 보며 소원을 빌었다.
‘면천하게 해주세요. 우리 아버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엄마랑 아버지랑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옆을 보니 막개의 얼굴이 불빛에 일렁였다.
“너는 무슨 소원 빌어?”
두치가 막개를 툭 치며 물었다.
“알아서 뭐하게?”
“혹시 알아? 내가 도움이 될지?”
“노비가 무슨 소원이 있으려고? 그냥 굶어 죽지나 않고,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막개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멈췄다.
“동학군이 쳐들어온다.!”
바로 그때 함성이 들렸다.
낫이며 쟁기를 든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달집을 둘러싼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며 흩어졌다.
--- p.130
아버지가 황 첨지의 문갑을 뒤지며 말했다.
“자네 손도장이 찍힌 걸 찾아!”
따라 들어온 곰보 아재가 말했다.
“그렇지.”
두치 아버지가 손도장이 찍힌 문서를 다 꺼냈다.
“이걸 모두 태워버리자고!”
두치 아버지가 온 집안 노비 문서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사랑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두치도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아버지는 사랑 마당에 서 있던 횃불에 노비 문서를 가져다 대었다. 불이 아버지가 움켜쥐고 있는 문서에 옮아 붙었다.
“이제부터 자유다!”
두치 아버지가 소리쳤다.
두치와 두치 아버지가 서로 끌어안으며 펄쩍펄쩍 뛰었다.
---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