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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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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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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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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예정일 미정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62g | 140*200*20mm
ISBN13 9791162850008
ISBN10 11628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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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타고 있던 택시가 사고가 나 딱 며칠만 병원에서 쉬고 싶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조금 전까지 하고 있었다. 내 능력의 120퍼센트를 발휘해도 상사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기에 늘 죄인의 심정이었다. 밤마다 부족한 내 탓과 가혹한 회사 탓을 저글링 해댔다. 매일 무리하고 있는데도 유독 내게만 일이 몰리는 것 같아 굿판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죄책감과 피해의식도 덩치를 키워갔다. 무엇보다 꿈을 이뤘는데 이렇게 불행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꿈에 데인 여자」중에서

흰 수건을 링 위에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시는 일하지 못해도 괜찮겠냐’고. 두 번의 사표는 내게 ‘조직 부적응자’라는 주홍글씨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그만두면 난 노동시장에서 최하등급인 ‘애 없는 기혼 여자’가 된다. (조직은 ‘육아휴직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애 없는 유부녀를 가장 꺼린다.) 다시 일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수건을 던졌다. 다시는 일하지 못해도 좋다는 결심이 섰을 때였다. ---「100대 1 세상, 탈진하고 시작한 사회생활」중에서

돌이켜 보면 전조가 있었다. 결혼 후 회사 선배로부터 받는 질문의 결이 달라졌다. “신랑 밥은 해주니? 아기는 언제 가질 거니?” 별 뜻 없이 건넨 질문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좀 낯설었다. 결혼 전엔 ‘앞으로 어떤 부서에 가고 싶냐’로 시작해 커리어 상담으로 끝났던 대화가 어느새 ‘살림’과 ‘출산’에 대한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결혼 후 일이 아닌 것들에 대해 답하는 날이 많아졌다. ---「결혼 후 그들은 덜 중요한 일을 권했다」중에서

전업주부가 되고부터 돈을 쓸 때마다 옅은 죄책감이 들었다. 돈은 벌지 않으면서 소비만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미안했다. 이 죄책감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졌다. 돈을 벌지 않는 내가 가계에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여는 ‘절약’뿐이라고 생각했다. 상시적 죄책감과 ‘절약 강박’은 궁상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때 알파걸이었던 내가 전업주부로 산다는 건」중에서

전업주부로 지내면서도 사람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요가원이나 자주 가는 카페에서 우연히 친구의 인연이 맺어지길 기대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물론 방법이 없진 않았다. 여성 커뮤니티에는 ‘임신 준비하는 ○○ 전업주부 친구해요~’ 같은 친구 구인 광고가 종종 올라온다. 하지만 결혼도 ‘연애결혼’을 고집했던 나는 친구도 자연스럽게 사귀고 싶었다. ---「에어로빅보다 커피 타임이 더 중요했던 이유」중에서

그만두기 전엔 전업주부 동지인 엄마와 근사한 데서 식사도 하고, 백화점 쇼핑도 다니고, 동남아 여행도 다녀오려 했다. 하지만 막상 내 월급이 아닌 ‘남편의 월급’으로 이런 비용을 쓰려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에게 미안했고 때론 부채감까지 느꼈다. 내가 빚졌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그가 내게 무언가를 ‘베풀었다’는 의미도 된다. 나의 효도가 남편의 ‘선의’(혹은 호의)에 기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커뮤니티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친정에 돈 못 쓰게 하는 남편’ 류의 글은 막연한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복잡한 문제 효도는 셀프」중에서

여성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시부모의 요구가 과한지 아닌지를 봐 달라고 묻는 글에 달리곤 하던 ‘전업도 아니고 똑같이 맞벌이하는데 그걸 왜 하냐’는 댓글들. 이런 말들은 내게 ‘돈을 벌지 않으면 어느 정도 시댁의 부당한 요구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같은 ‘을’의 처지에서 ‘갑’을 성토하는 장場에서도 경제활동을 해야 ‘발언의 자격’이 생겼다. 위로받으러 갔다가 오히려 위축됐다. ---「일 안하는 며느리 죄인일까」중에서

반대로 더 바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가사 노동을 당당하게 요구했던 나는 군말 없이 남편의 흔적을 치워야 하는 전통적인 여성으로 변신해야만 했다. 전업주부는 가사를 전담하는 사람이기에 이 전환은 당연한 거라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30년 가까이 남녀평등을 부르짖었던 내게 이는 ‘전환’이 아닌 ‘퇴행’처럼 느껴졌다. 머리와 마음이 엇박자를 냈다. ---「뼛속까지 양성평등 주의자가 전업주부로 산다는 것」중에서

서른을 기점으로 전후 5년 동안 여자는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를 압축적으로 겪는다. 직업을 선택하고, 평생 함께 할 남자를 선택하며, 엄마가 될지(혹은 말지)를 선택한다. 숙고할 시간은 없는데 연속적으로 선택 앞에 놓인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발자크가 “삼십 대는 여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말한 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버려야 다 버리지 않는다」중에서

반면 나는 ‘내조’의 이름으로 저녁을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를 했다. 종합비타민과 오메가3 같은 영양제를 챙겨주기도 했다. 그가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맡아주는 게 내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걸 그닥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에 친구도 만나고 책도 더 읽고 글도 더 쓰라고 했다. 나에게 뭔가를 해주려고 하지 말고, 그 공력을 네 인생을 다시 세우는 데 쓰라는 격려이자 압박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선물한 자기만의 방」중에서

일이 내게 주었던 건 생각보다 많았다. 밥벌이를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관계에서의 당당함과 발언권을 줬고, 시간이 흘러간 자리에 꽤 굵직한 추억을 남겨줬다. 무엇보다 작든 크든 사회에서 나만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생이 한 층 활기를 띄었다. 일 속에서 많이 울고, 다치고, 헐떡였지만 동시에 일 속에서 가장 전력을 다했다. 이제는 안다. 위기를 감수하지 않으면 활기도 없다는 것을. ---「일도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중에서

여성이 당당하게 서기엔 여전히 기울어진 세상. 적지 않은 여성이 회사를 뛰쳐나와 집으로 뛰어들까 고민한다. 그토록 간절하던 평온을 집에서 찾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나는 끝내 찾지 못했다. 당당함이 빠진 평온은 일시적이었다. 해 좋은 오후 이불을 널며 찰나의 평온함을 맛봤으나 그보다 몇 배는 긴 시간 빳빳해진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가짜 평온’에 당당함을 내주지 않을 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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