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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최상] 조선판 오만과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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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560쪽 | 518g | 130*190*35mm
ISBN13 9791104914102
ISBN10 1104914107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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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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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깨나 있는 사내에게 부인이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였다. 그래서 그런 남자가 고을에 들어오게 되면, 혼기가 찬 딸을 가진 집에서는 마음대로 그 남자를 자기 딸에게 적당한 배필로 점찍었다. 물론 그 부모들은 딸이나 사내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건 장연에 사는 혜인 홍씨도 마찬가지였다.
“나리! 소식 들으셨습니까?”
삼월 열나흘, 황해도 장연에 위치한 양현수(陽現守)의 집. 박씨 부인이 흘리고 간 소문을 전하기 위해 혜인 홍씨가 호들갑스럽게 사랑채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의 남편 이 결(結)은 종친부에 적을 둔 이로 봉호는 양현(陽現)이요, 품계는 정사품 수(守)로 마을에서는 통상 양현수 나리로 불렸다. 그녀는 종친인 남편에 따라 혜인(惠人)의 작호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지만 뛰어 들어가는 모습에서 품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판부인 댁에 왔다는 그 외손자 이야기를 하려는 게요?”
부인의 호들갑에 양현수가 무심히 대답했다. 혜인 홍씨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부인이 언제쯤 물어보려나 했소이다.”
“나리께서도 참! 알고 계시면 진작 귀띔을 좀 해주시지는. 그럼 그 외손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들으셨어요?”
“그대가 얘기하고 싶어 못 견디겠다면 들어줄 용의는 있소.”
말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남편의 말에 홍씨가 백이명의 사주팔자부터 집에 기왓장 수까지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름은 백이명, 이름만큼 얼굴도 곱상하니 미장부랍디다. 아직 관직에 나가지는 않은 진사라는 게 좀 그렇지만 집안이 그렇게 좋으니 곧 잘되지 않겠습니까?”
홍씨는 백이명이 한양에서 유명한 백씨 집안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낸 모양이지만, 그가 파직을 당하고 돌아온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장연은 한양 소식을 듣기에는 워낙 먼 곳이기도 했고, 백이명과 심도헌은 자신들의 신분을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진사라 소개했으니 다들 그들이 그저 한양에서 내려온 진사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겠구려.”
잘되든지 말든지 상관없다는 성의 없는 대답에 혜인 홍씨가 남편의 곁에 더욱 붙어 앉았다.
“백씨 집안에 땅이며 재산이 얼만지, 비어 있는 안집에 비녀며 금붙이며 마를 날이 없을 정도라는 건 유명하잖아요.”
“한양에서 알아주는 집안이니 패물 따위야 얼마든지 굴러들어 오겠지.”
양현수는 아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쏟아내는 정보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혜인 홍씨가 이게 가장 중요한 정보라는 듯 야심차게 한마디를 더 붙였다.
“게다가 아직 혼인을 안 했다 합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양현수는 정말로 백이명의 혼인 여부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딸이 다섯이나 있기는 했지만 그런 훌륭한 사윗감은 자신의 집안과 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왕자군의 중증손인 그가 가진 종친계 품계는 허울에 불과하고, 단지 종친으로서 받은 토지에서 나오는 소작료로 간신히 품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권력이나 큰 재물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었다.
“나리,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 백이명, 아니 백 진사가 우리 애들 중에서 그 집 안주인을 고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혜인 홍씨는 가난한 종친의 자식인 자신의 딸과 백이명 같은 사내가 맺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양현수는 허영심 가득한 아내를 한심하게 한번 쳐다보고는 서책으로 눈을 돌렸다.
“나리께서 백 진사를 집으로 좀 부르셔요. 나리께선 이 마을에 하나뿐인 종친 어른 아니십니까. 고을에 새 사람이 들었으니 당연히 보셔야지요.”
“그건 약조할 수가 없소이다.”
“딸들을 위한 일인데 그것도 못하십니까? 아니 이 촌에서 어떻게 다시 저런 사윗감을 구한답니까.”
도저히 책을 더 읽지 못하게 하는 아내의 조름에 별수 없다는 듯 양현수가 종이를 펼쳐 들었다.
“그럼 내 편지를 한 통 적어줄 터이니 우리 딸들 중에 한 명에게 선물을 들려 보냅시다. 우리는 아들이 없으니 딸을 보내도 개의치 않을 것이오. 내 생각에는 우리 귀여운 둘째 연리 손에 보내면 되겠구려. 편지에 우리 딸들 중 누구든 부인으로 골라가도 된다고 미리 적어주리까?”
양현수가 딸들을 시집보낼 생각에 눈이 붉어진 아내를 놀리기 위해 한 말이었다. 물론 딸이 다섯이나 있기에 가능한 농담이기도 했다. 잔뜩 비꼬는 말에 홍씨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예쁜 데다가 온순한 첫째 설이를 두고 왜 꼭 연리입니까. 나리께서는 다른 아이들 다 두고서 항상 연리를 더 예뻐하시지요.”
홍씨는 둘째 연리(聯裏)보다는 첫째인 설(設)이 났다며 투덜거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미모는 다섯 딸들 중에서 맏이인 설이 가장 좋았다. 둘째인 연리도 설이 못지않은 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끝마다 논어니 공자니 하는 책들의 구절을 읊으며 옳은 말만 해대는 통에 홍씨의 미움을 좀 받고 있었다. 셋째인 가람도 책 읽기와 남에게 훈계하기를 좋아했지만 방 밖 외출을 꺼리고, 말수가 적어 그녀와 자주 부딪칠 일은 없었다.
“설이는 얌전하기라도 하지만 명진이나 가연이는 틈이 나면 사내 뒤꽁무니나 쫒아다닐 연구를 하니 어쩌겠소. 그에 비하면 연리는 머리에 든 것이 있어 영리하고 내세울 만한 구석이 있으니 예뻐할 밖에.”
양현수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딸들을 평가했다. 그와는 반대로 연리보다 넷째인 명진(明眞)과 다섯째인 가연(嘉聯)을 더 좋아하는 혜인 홍씨는 남편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명진과 가연은 홍씨처럼 마을 소문에 민감하고 뒷담화를 좋아해서 그녀와 잘 맞는 편이었다.
“서방님 딸들을 그렇게 욕보이시면 시원하십니까. 지금 내세울 아들을 못 낳았다 저를 구박하시는 게지요?”
“나는 그런 이유로 부인을 구박한 적이 없소.”
양현수 이 결은 과장되게 눈물을 찍으려는 부인을 감흥 없이 달래었다. 그리곤 정말로 백이명에게 보낼 선물에 동봉할 편지를 먹물 묻힌 붓으로 적어 내려갔다.
“서방님은 제 고통을 모르십니다.”
“그 고통 잘 견디시오, 부인. 그래야 안집에 금붙이가 넘쳐나는 그 백이명이라는 사내의 얼굴이라도 볼 게 아니요.”
양현수가 말을 마치면서 간단하게 적은 서신을 아내의 앞에 내밀었다. 혜인 홍씨가 그 편지라도 챙겨둬야겠는지 눈을 흘기며 편지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흥! 그런 신랑감이 와봤자 나리께서 나서지 않으시면 무슨 소용이랍니까.”
비꼬시는 재주는 여전하다며 결국 홍씨는 사랑채를 휙 떠났다. 스물세 해를 함께 살아온 혜인 홍씨조차도 남편의 속내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남편과 달리 성격이 단순한 그녀는 딸들을 시집보낼 사내를 찾아 수소문하는 것이 취미였고, 특기는 남의 딸이 혼인하면 배 아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간만에 백이명이라는 쓸 만한 사윗감 후보를 찾은 홍씨는 남편이 적은 편지를 들고서 딸들이 있는 별당으로 빠르게 향했다.

황해도 장연현은 앞에는 푸른 바다가, 등 뒤에는 독수리가 많이 살아 수리봉이라 불리는 산이 이 있어 정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수리봉 아래쪽에는 화평언덕이라는 작은 둔덕이 있었다. 그곳은 햇빛을 피할 만한 너른 그림자를 드리우는 큰 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그 아래서 책을 읽기 안성맞춤이었고, 나무의 큰 가지에 걸어놓은 그네는 연리 자매들의 재미 중 하나였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연리는 화평언덕 위 그네에 걸터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네 아래로 나온 작은 발이 땅을 딛고 흔들흔들 그네를 흔들었다. 봄기운이 스민 바람에 잔머리가 이마를 간질이는 것을 느끼며 연리가 눈을 감고 바람을 맞았다. 이 평화롭고 한가로운 시간이 연리에게는 그 어떤 시간보다 좋았다. 그런데 바람을 타고 미세한 말소리가 연리의 귀를 간질였다. 목소리가 굵고 큰 것이 사내의 목소리였고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그들이 화평언덕을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왔고, 연리는 급하게 그네에서 내려와 쓰개치마(장옷과 비슷한 상류층의 가리개)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연리가 미처 쓰개치마를 머리 위로 두르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덕을 막 올라온 사내는 큰 키에 보랏빛 도는 도포를 입은 선비였다. 그 선비는 자신을 보고 굳어 있는 연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도 이곳에 여인이 홀로 있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마을이 지대가 낮아 이쯤이면 한눈에 보일걸세.”
“…….”
“응? 왜 가만히 있나.”
백이명이 대답 없는 친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먼저 온 사람이 있군.”
그 말에 백이명도 연리를 발견했다. 연리는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두 젊은 선비가 낯선 얼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연리는 서둘러 쓰개치마를 쓰고 사내들을 빠르게 지나쳐 언덕을 내려갔다.
“우리가 저 소저를 놀라게 한 모양인데?”
백이명이 언덕 위로 마저 올라서며 말했다. 그 사이 도헌은 연리가 붉은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남아 갈색으로 말라 있는 언덕에 연리의 치마는 지나치게 눈에 띠었다. 연리가 언덕을 다 내려가서야 도헌은 그녀에게서 눈을 뗐다.
“여하튼, 딱 보기에도 작은 고을이지? 저기 보이는 것이 장연관아고,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는 우리가 들어온 산길과 저기 반대편 몽금포 바다로 이어지는 길 두 개가 전부일세.”
도헌이 이명의 설명을 들으며 장연의 모습을 찬찬이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저 멀리 보이는 기와집이 아마 종친이신 양현수 나리의 집일걸세. 이 마을에 우리 외조모님의 집을 빼면 저 집이 가장 크지.”
장연에서 가장 큰 기와집은 당연히 백이명의 외가였고, 그 다음이 종친 양현수의 집이었다. 도헌과 이명은 한참이나 언덕에 서서 마을에 있는 길들과 지도를 비교하고, 호구 조사표를 죽 훑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지만 도헌은 대충이나마 장연의 길들과 산길, 밭의 넓이와 초가집의 수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언덕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 종친 양현수의 집으로 붉은 치마를 입은 연리가 들어가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연리가 막 집에 들어갔을 때, 연리의 언니인 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서 그녀를 붙잡았다.
“연리야! 어디 갔었어. 어머니께서 널 얼마나 찾으셨는데.”
“잠깐 화평언덕에 다녀왔어. 무슨 일인데?”
연리가 쓰개치마를 벗으며 설에게 말했다.
“연리야! 어딜 그리 쏘다니는 게야!”
무슨 일이냐 묻던 연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불호령에 화들짝 놀랐다. 연리는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쓰개치마 사이에 서책을 숨기려고 꼼지락거렸다. 서책을 읽고 왔다는 것을 들켰다가는 하나 혼날 것을 둘로 혼날 터였다. 그런데 감추려고 보니 몸 어디에도 서책이 없었다. 연리가 텅 빈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아- 하고 소리를 냈다. 화평언덕에서 낯선 사내들을 보고 놀란 마음에 그네에 책을 그대로 두고 온 것이었다.
연리가 서책을 걱정하고 있는 동안 혜인 홍씨는 안채에서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와 연리를 별당으로 잡아끌었다.
“얼른 들어가 옷 갈아입고 나오너라.”
“옷은 왜요?”
다짜고짜 옷을 갈아입으라는 어머니의 닦달에 연리가 그제야 언니인 설의 옷차림을 발견했다. 못 보던 새 비단옷에 꽃신을 신고 있는 설은 자기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은 어머니에 등쌀에 못 이겨 언니처럼 비단옷을 갈아입은 연리가 딱딱한 새 꽃신에 발을 욱여넣었다. 새신발이 불편해 발을 꼼지락대는 연리의 손에 혜인 홍씨가 비단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들려주었다.
“너희 아버님께서 참판부인 댁에 가져다드리라 한 거다. 그 집 외손주가 한양서 내려왔다는구나.”
홍씨는 그 외손자를 집에 초대하지 못할 바엔 정말 남편의 말대로 선물이라도 들려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리는 그 집 외손주가 내려왔는데 옷은 왜 갈아입어야 하며, 선물은 왜 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보자기를 들고 어리둥절해했다.
“너희가 시집을 잘 가야 동생들도 길이 트여 시집을 잘 갈 게 아니니.”
그러니까 홍씨의 말은 선물을 주고 오는 김에 그 집 외손자와 눈도장을 찍고 오너라, 그 말이었다. 혼기가 꽉 차가는 언니와 자신을 시집보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어머니를 아는지라 연리는 말귀를 알아듣자마자 설을 이끌고 후다닥 대문 밖으로 나왔다. 괜히 꾸물대다가는 또 한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놀러 간다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오자.”
매사에 긍정적인 설이 가기 싫어하는 티를 내는 연리를 다독였다. 다행인 것은 연리 자매들이 걷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가마를 타는 것보다도 말을 타거나 걷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마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다리에 쥐가 나기 십상이었고, 하늘 구경도 할 수 없어 답답했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쓰개치마 대신 쓴 너울립(羅尤笠, 전모에 망사 천을 드리운 모자)의 너울이 하늘거렸다. 연리와 설이 얼굴을 간질이는 너울을 붙잡고서 참판부인 댁으로 향했다. 참판부인 댁은 연리가 방금 전까지 책을 읽던 화평언덕을 지나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야 갈 수 있었다. 화평언덕까지만 해도 거리가 꽤 있었으나 연리의 자매들은 자주 다니는 길이라 익숙하게 걸어갔다.
“연리야, 조심해서 건너.”
조잘조잘 떠들면서 오다 보니 금세 개울가에 다다른 두 사람이 징검다리를 조심히 건너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세 번째 돌 위에서 비틀거린 연리와 설이 까르르 웃었다. 혼자 왔다면 지루해 못 견뎠을 시간이었지만, 둘인 덕에 발 아픈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참판부인 댁에 도착했다.
그 뒤는 순조로웠다. 연리와 설은 참판부인을 만나 양현수의 서찰과 선물을 전달했다. 그러나 혜인 홍씨의 바람과 달리 불행히 그 집의 외손자는 출타 중이라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참판부인의 외손녀들이자 백이명의 누이들인 백소진과 백소윤을 만날 수 있었다. 소진은 설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고, 소윤은 설과 동갑이었다. 첫눈에 설을 마음에 들어 한 소윤은 이 마을을 잘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어 심심하다며 꼭 다시 놀러와 달라고 설에게 부탁했다. 물론 마음씨 고운 설은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답해 만남은 화기애애했다.
“자매들이 참 곱다. 그치?”
설이 참판부인 댁을 빠져나오며 백소진과 백소윤이 참 곱지 않더냐고 연리에게 물었다. 정확히는 설이 곱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들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들이 입은 옷가지였다. 그녀들의 옷은 화려했고 장신구는 크고 비싸 보였다. 아마 한양에서 유행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연리가 정말 비싸 보이기는 했다고 설의 말에 동의하며 참판부인 댁을 나가기 위해 대문을 열었다. 대문을 나서며 너울립을 쓴 연리는 화평언덕에 들러 놓고 온 책을 챙겨가자고 설에게 말하려고 했다.
“가는 길에 화평언덕에 들러서, 어?”
하지만 연리의 말은 앞을 가로막은 무언가에 부딪쳐 끝맺어지지 못했다. 코를 문지른 연리는 곧 자신이 부딪친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앞을 못 봤어요.”
부딪치면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거라 연리는 앞을 미처 못 봤노라 사과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연리가 의아함에 자신과 부딪친 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연리의 눈앞에는 조금 전 화평언덕에서 보았던 그 선비들이 서 있었다. 그중 자신과 부딪친 이는 보라색 도포를 입은 그 사람이었다. 마을에서 못 보던 젊은 선비들이다 했더니 그들이 참판부인 댁 사람인 것 같았다. 연리는 이 둘 중 한 사람이 참판부인의 외손자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외손자가 둘이나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둘 중 누가 외손자인 백 진사일까.’
연리는 순수하게 의문이 들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 연리와 부딪친 사내는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그저 몸을 틀어 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연리는 어이가 없어졌다. 부딪치기는 같이 부딪쳐 놓고 사과는 받기만 하는 그 태도는 뭐냐고 따지려다가, 설이 그런 연리를 눈치채고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설은 개의치 말라는 뜻으로 두 선비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연리를 이끌고 대문 앞을 벗어났다. 백이명은 갓을 살짝 잡고서 설에게 마주 인사했다. 그렇게 자신의 외가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두 여인을 지켜보던 백이명은 문득 생각난 듯 말문을 열었다.
“흠, 옷이 다르긴 하지만 아까 그 소저가 아닌가?”
백이명이 개울을 향해 걸어가는 설과 연리 중 연리를 가리켰다. 이명은 너울에 가려 정확히는 못 보았지만 화평언덕에서 만난 소저와 방금 도헌과 부딪친 소저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헌도 생각해 보니, 큰 눈이 놀라서 더욱 커져 동그랗게 변하던 모습이 똑같은 것도 같았다.
“아.”
심도헌이 불현듯이 소매 안쪽에서 작은 책을 꺼내 들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저 소저가 떠난 뒤, 화평언덕 그네 위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차라리 주인을 몰랐다면 안 챙겼을 텐데, 그녀가 양현수 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의상 챙겨두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던지라 돌려줄 기회를 놓쳐 버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심도헌은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면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책을 다시 소매 안쪽에 넣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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