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디자인을 수단으로 활용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할지 깊이 생각하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사변 디자인)이다. 이런 형태의 디자인은 상상을 통해 성장하며, ‘난제wicked problems’로 불리는 문제에 새로운 관점을 불어넣고 대안적 삶의 방식에 관한 토론과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흘러가듯 상상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영감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디자인 사변design speculation은 우리와 현실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재정의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
--- p.16, 「래디컬 디자인을 넘어서?」중에서
이제 젊은 세대는 꿈을 꾸지 않는다. 희망할 뿐이다. 우리가 생존할 수 있기를, 우리 모두가 사용할 물이 남아 있기를, 모두가 먹을 만큼의 식량이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낙관적이다.
--- p.26, 「래디컬 디자인을 넘어서?」중에서
흔히 어떤 것이 개념적이면 아이디어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핵심을 놓치는 말이다. 중요한 건 아이디어기 때문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개념 디자인은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이상향(ideal)이 기도 하다. … 우리는 현실을 바탕으로 이상향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해야 한다.
--- p.31, 「비현실 지도」중에서
디자인은 오로지 물건을 멋지게 만드는 일로 간주된다. 마치 모든 디자이너가 절대 무엇이든 추하게 만들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이런 생각의 제약과 방해로 디자이너는 늘 멋질 수만은 없는 복잡한 인간 본성에 전심으로 교감하지 못하고, 이를 위해 디자인하지도 못하게 된다.
--- p.64, 「비평으로서의 디자인」중에서
대중은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논의에 시민으로 참여해 윤리적·도덕적·사회적 쟁점을 막연히 논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비자로 행동할 때 이런 일반적 신념을 유보하고 다른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 생명공학 분야의 서비스나 상품을 사용하고 싶을 때는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에 차이가 나타난다. 보통 큰 쟁점을 논의할 때는 시민으로 참여하지만, 현실을 형성하는 것은 소비자로 참여할 때다. 기술이 일상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품으로 구매되었을 때뿐이다. 구매 행동이 우리 기술의 미래를 결정한다. 사람들에게 대안 미래에서 온 허구 제품과 서비스, 시스템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시민형 소비자citizen-consumer로서 비판적인 태도로 접근할 수 있다. 모순되는 감정과 반응이 복잡하게 뒤섞이면 생명공학에 대한 논쟁에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
--- p.78, 「거대하고 완벽하며 전염성 있는 소비 괴물」중에서
제임스 킹의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축산업이 사라진 세상에서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새로운 종류의 음식에 어떤 방식으로 형태와 질감, 맛을 부여하는지 살펴본다. … 더 이상 동물이 도축되거나 고통받을 필요가 없으니 채식주의자들은 이 음식을 먹을까? 우리는 실험실에서 배양한 유명 연예인의 인육을 먹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사랑해서일까, 증오해서일까?
--- p.90, 「거대하고 완벽하며 전염성 있는 소비 괴물」중에서
우리에게 사변의 목적은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현재를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려면 디자인은 산업과 이별을 고하고, 사회적 상상력을 온전히 발전시키며, 사변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 그러면 MoMA 디자인 수석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가 말한 것처럼 직면한 도전 과제에 관해 생각하고, 성찰하고, 영감을 주고,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데 헌신하는 이론적 형태의 디자인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p.130, 「방법론의 장: 허구 세계와 사고실험」중에서
사변 작업에는 미래를 지향한다는 가정이 있는데, 그 미래는 가능할 수도 있는 미래가 아닌 다른 미래, 즉 이 세상의 평행 세계일 수도 있다. 사변 작업의 미래적 측면을 버리면 즉각적으로 미학적 실험과 대안 현실에 대한 창의적인 묘사의 범위가 넓어진다. 가장 잘 알려진 영화의 비장소는 조지 루카스George Lucas의 영화 ?THX 1138?(1971)의 희고 광대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미래 공간 또는 비장소의 원형이다. 그러나 흰색이 항상 미래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실험, 혹은 더 나아가서 사고실험을 바라본다고 암시할 수도 있다.
--- p.185, 「비현실의 미학」중에서
숨어 있는 현실이 사변의 미학에 흥미로운 이유는 무엇일까? 숨겨진 현실 그 자체가 비현실과 맞닿아 있고, 그중 상당수가 실제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장소나 장치는 유일무이하거나 몇 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숨겨진 현실은 극단적인 가치를 담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가치다. 마치 우리 세계의 극단적인 측면이 어떤 방식을 통해 전반적인 환경의 모습으로 일변한 평행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숨겨진 현실이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미지는 사변의 미학을 위한 프로토이미지(proto-image)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 우리가 변화할 잠재적인 모습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기술의 관념적 장면을 제시한다.
--- p.195~197, 「비현실의 미학」중에서
우리는 실행할 수 없는 대안이라도 상상력만 넘친다면 가치가 있으며 각자 자신만의 대안을 떠올릴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정확히 어떤 것을 지칭하지 않더라도 확실히 그보다 더 많은 일이 가능하다는 느낌을 주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은 현실 그 자체뿐 아니라 우리와 현실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데도 기여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스페큘러티브 디자인을 넘어 모든 것을 사변하기로, 즉 다양한 세계관과 이념과 가능성을 생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의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며, 우리 머릿속의 아이디어가 바깥으로 나와 세상을 형성한다.
--- p.226~227, 「모든 것을 사변하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