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인생에서 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죽음’과 ‘섹스’ 뿐이라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으라고. 그들은 진실을 말하니까.
--- p.19, 「프롤로그」 중에서
“일을 그만두시고, 신변 정리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이 문장이 귀에서 무한반복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두는 건 잘할 수 있겠는데, 신변 정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 p.24, 「80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중에서
매사 잘 참고 견뎠다. 인내와 끈기 하면 나였다. 근데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사실 내가 두려운 건 죽음 같은 게 아니다. 매일 조금씩 진행되는 나에 대한 믿음의 상실, 자신감의 상실 같은 것이다.
--- p.35, 「나와 약속을 했습니다」 중에서
한국은 안락사, 존엄사를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기 암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은 내가 나의 죽음에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권이다.
--- p.40,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중에서
밤 12시. 예전의 나라면 다이어리를 펴고 오늘의 to do list를 적으며, 더욱 효율적인 하루를 계획하고 있을 하루의 첫 시간. 나는 마약성 진통제를 삼킨다. 그렇지 않으면 통증 때문에 똑바로 눕기조차 힘들다. 뭘 모를 땐 마약성 진통제만 먹으면 제어될 줄 알았는데, 실전에 돌입해보니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참을 수 없는 통증과 견딜 수 있는 통증으로 구분되는 진통제 전후의 상황이 두렵고, 무엇보다 변비, 구토증, 가려움증, 어지럼증, 졸림과 불면증 등 다양한 부작용을 견뎌야 한다.
--- p.44, 「통증을 아십니까?」 중에서
직장을 핑계로 집을 나왔다. 매일 밤, 마약성 진통제를 먹을 때마다 오늘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일까? 하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왼쪽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직 죽음, 끄트머리만 생각하던 나에게 마비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임종이 내가 생각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허덕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 p.51, 「집을 나왔다.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중에서
병원에 다녀오면 뒷일 생각 없이 단번에 죽는 약을 한입에 털어 넣고 막걸리랑 원 샷 하고픈 기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증으로 차곡차곡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누구든 날 건드리면 독화살 같은 말을 받을 줄 알아라! 커피 머신 앞에서 버벅거리던 아빠가 걸렸다. “아빠, 전에 내가 다 설명했잖아!” 남아 있던 에너지를 실어서 내질렀다. 곧 후회했지만, 미안하단 말은 못 했다. 아까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 p.55, 「병원 가는 날」 중에서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늘 계획부터 세우던 나였는데, 이제 더는 그러지 않는다. 하루가 끝나고 자리에 누울 때면 삶이 끝난 듯이 눕는다. 부디 저를 축복하셔서 오늘 밤 고통 없이 잠든 사이에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러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시작된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몸무게를 재고, 물을 마시고. 그렇게 주어진 하루를 담담히 산다.
--- p.66, 「말기 암 환자 환자가 되고 달라진 점」 중에서
나의 진가를 확인하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죽고 싶을 만큼 아픈 순간에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나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 아프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란 걸 깨달았다. 내가 없이는, 세상도 없다는 것을.
--- p.87, 「시한부의 좋은 점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중에서
가지고 있다고 여기던 것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 말하자면 살면서 차곡차곡 적금 붓듯 적립해온 자존감을 계속 까먹어가는 기분이다. 작은 성취들로 다져졌던 나의 견고한 성이 모래성처럼 자꾸 힘없이 무너진다. 늘 쓸모 있는 인간이길 바랐는데 지금 나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아니 어쩌면 오히려 누군가의 무거운 희생으로 살아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그러니까 내 소중한 당신은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p.92, 「당신이 암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중에서
고통과 죽음을 끌어안고 보냈던 한 해가 지나고 있다. 최선을 다 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엄마의 목표와 꿈이 나였던 게 기억나 울컥 목이 멘다. 차갑게 돌아서려던 내 인생 앞에, 눈물이 자꾸만 툭툭 떨어진다.
--- p.103, 「미련이 있냐고요?」 중에서
약을 안 먹었을 땐 통증에, 약을 먹었을 땐 부작용의 한계에 봉착해서 제발 이제 그만 눈 감았으면 하다가도 오늘 밤이 끝이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다 빈다. 동생 생일까지만, 조카 생일까지만, 겨울이 지날 때까지만. 밤마다 딜을 한다. 제가 더 견뎌볼게요. 그러니까…….
--- p.151, 「살고 싶은 순간들은 너무 많지요」 중에서
죄가 커서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이 나를 피하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참을 만은 했다. 그런데, 내가 아픈 게 엄마 아빠의 업보란 소리는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가 암에 걸린 이후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는 우리 엄마 아빠에게 그러는 건, 반칙이다.
--- p.178, 「제발 업보라고 말하지 마세요」 중에서
나의 장례가 슬픔과 눈물이 아니라, 앞으로 당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각오와 유머로 가득 채워지길 바랍니다.
--- p.193, 「내 장례식에 못 올 가능성이 큰 당신에게」 중에서
적지만 나눌 게 있는 삶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몇몇 사람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꽤 괜찮은 삶이었다. 고통 속에 무릎 꿇고 엎드려 쓴 글들이 내가 세상에 진 빚을 갚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한다.
--- p.198,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