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았다 뜨면, 한 10년쯤 시간이 지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열일곱 살이었던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그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 한 가족이 부서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란이 지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불행이 필요한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긴긴 시간 불행이 일상처럼 머물렀다.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으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웃는 얼굴을 썼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공부 잘하고 잘 웃는 착한 아이. 하지만 내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 조숙한 아이로 살았다.
--- p.17, 「순간이 나를 붙잡은 순간」 중에서
나의 시간은 바쁘게 흘렀지만, 엄마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엄마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지금 많이 바빠?”
“아냐. 괜찮아.”
“그럼 엄마 부탁 하나만.”
“뭔데?”
“엄마가 휴대폰을 바꾸면서 문자 메시지 500개 저장된 걸 다 지웠어. 문자는 옮길 수가 없다는 거야. 그래서 지금 휴대폰에 메시지가 하나도 없어. 네 문자도 지워진 거 있지. 다 저장해놨었는데…. 그러니까 지금 메시지 하나만 보내줘. ‘사랑해’라고.”
“부탁이 겨우 그거야?”
“메시지가 하나도 없으니까 엄마 너무 쓸쓸해. 바빠도 지금 바로 ‘사랑해’ 메시지 하나만 보내줘. 꼭! 알았지? 그럼 얼른 일해. 엄마 끊을게.”
--- p.25, 「엄마에게 보낸 첫 번째 메시지」 중에서
할 일을 마치고 나는 허기라도 채울 겸 컵라면을 골랐다. 진열대에 불닭볶음면이 보였다. 아까 남자애가 먹었던 컵라면. 요새 애들은 이거 되게 좋아한다던데 맛있을까. 많이 매우려나. 나는 불닭볶음면을 집었다. 물 붓고 자리에 앉아 멀뚱히 익기를 기다렸다. 그사이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결국은 혼자 라면이네. 바람맞힌 친구가 원망스러워지려는 찰나.
“엄마는 왜 맨날 약속을 못 지켜.”
남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 애.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속상해하고 있었다. 엄마가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고 있다는 걸, 약속을 꼭 지키고 싶지만 못 지키고 있다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휴대폰 너머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p.57, 「코끝이 찡 눈물이 핑」 중에서
마음 어딘가에 늘 미움을 안고 살았다. 그 뾰족한 마음이 자꾸만 사방을 찔러대 곁에 있던 사람도 다가오는 사람도 나 자신조차도 아프게 했다. 미움을 품고 사는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해본 사람은 안다. 다른 사람을 지독히 미워하느라 정작 자신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돌아보면 안타깝고 가여운 시간이었다.
--- p.95, 「나는 연필이었다」 중에서
나는 울라브 하우게와 같은 시인들을 많이 만났다. 비록 시는 쓰지 않지만 내뱉는 말마다 시가 되는 사람들. 평생 노동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삶 속에서 체화된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쉽고 정직하고 진솔한 말들. 그 말들이 무심하게 모여든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루하루 노동으로 일군 삶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나는 느꼈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넋 놓고 감동했던 것이었다.
--- p.166, 「무지렁이 시인의 말들」 중에서
한때는 견딜 수 없었던 시간들이 충만하게 느껴진다. 빛이 사라진 동안, 받았던 사랑을 더듬고 나누었던 마음을 느끼고, 나는 나를 채우며 빛을 기다린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고 봄이 오기 전이 가장 춥다는 것을. 결국 다시 빛이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
--- p.180, 「광합성」 중에서
언제든 넘치는 애정과 친절한 호의, 언제고 든든한 울타리와 따뜻한 집이 거짓말처럼 모두 내 것일 리 없다. 아등바등 살아도 잴 것 많고 상처받을 일 많은 세상에서 제 몸 하나 살아내기 빠듯하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일은 그렇게나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아가는 데 그리 많은 사랑이 필요한 건 아니다. 힘들고 지칠 때 딱 한 명만. ‘내가 네 편 해줄게’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 p.211, 「당신에겐 온전한 내 편이 있나요?」 중에서
“우리 너무 슬프지 않아요?”
나는 물었고 그녀는 슬픈 눈으로 웃었다. 이상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우리의 슬픔은 결코 따뜻하지 않지만 당신도 나처럼, 나도 당신처럼 슬펐다는 사실이 안도와 위안이 되었다. 그러자 마음이, 그 어떤 경계심도 조바심도 없이 함부로 따뜻해졌다.
--- p.221, 「어떤 슬픔들은 따뜻하다」 중에서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려울까,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어려울까.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두 가지 일은 서로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만 같다.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자신을 희생해야 하니까.
--- p.235, 「너는 자라 내가 되었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