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 일을 거절한다면요?”
그리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걸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 모든 것을 다 보고서? 앞으로 목격하게 될 모든 일을 뒤로한 채 떠날 수 있을 것 같나?”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내 말 똑똑히 들어요, 노인장. 난 절대…….”
“협박은 그의 일이 아냐.”
순간 잭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몸을 돌리자 바로 뒤쪽에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건 내 일이지.” 남자가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잭보다 키가 큰 그 남자는 낡은 검은색 작전복을 입고 있었다. 젊고 창백한 남자였다. 창백해도 너무 창백했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고요해서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았다. 관 속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고요함이 흘렀다. 남자는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잭은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났다. 머릿속에 ‘도망쳐’라는 글자가 가득 찼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잔뜩 겁을 먹은 채 모닥불 가장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처럼 본능적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것 같았다. 문득 잭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사냥해온 존재와 한자리에 있음을 직감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 최상층 포식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때 남자가 미소를 짓자 송곳니가 드러났다. 잭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말을 하려고 애썼지만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뭔가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잭의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랬다. 잭의 눈앞에 버티고 선 그 존재는 분명히 뱀파이어였다. 잭과 뱀파이어, 그 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잭의 신발 주변에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잭이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린 것이었다. 뱀파이어가 미소를 거두더니 잭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그리프에게 말을 걸었다.
“이 애송이가 신참이야?”
“이쪽은 잭 배로스, 저쪽은 너대니얼 케이드. 대통령의 뱀파이어야.” 그리프가 두 사람을 소개시켰다.
잭은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케이드가 다시 한 번 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걸레 있는 곳부터 알려줘야겠군.”---pp.32~33
“하느님 맙소사……. 누군가가 우리를 죽이려고 드는 판에 은행강도라는 꼬리표까지 달고 다니자는 겁니까?”
“임무수행이 우선이야.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경찰한테 잡히면 뭐라고 할 건데요? 네? 생각해보기나 했어요? 하느님 맙소사, 젠장, 하느님 맙소사.”
“그만.” 케이드가 으르렁거렸다.
그 말 한마디가 따귀처럼 잭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잭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케이드의 얼굴이 분노와 고통으로 어두워졌다. 케이드가 잭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그만해.” 케이드가 다시 말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들리는 목소리 같았다. “임무수행에 필요한 일이야. 그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명심해.”
우왕좌왕하던 잭은 어느새 사라지고 공포에 질린 잭이 그 자리를 채웠다. 폭탄 공격에 무섭도록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잭에게는 여전히 케이드가 더 무서운 존재였다.
다행스럽게도 케이드의 마지막 남은 기운이 다한 것 같았다. 케이드가 좌석 위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그의 두 눈이 퍼덕거리다가 감겼다.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케이드는 햇빛에 익어가고 있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시시각각 그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안개가 걷히면서 또 하루가 아름답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잭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떠날까 생각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발각되기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히 잭을 알고 있다.
게다가 케이드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라도 케이드가 아니었다면 잭은 지금쯤 잔해 더미 아래에 스며든 한 줌의 핏덩이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잭이 표적이라는 것과 이 상황에서 잭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pp.274~275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지난 24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그동안 알아낸 모든 사실을 소화해내려고 가상의 기자회견을 상상했다. 한동안 백악관에서 일해본 경험으로, 승냥이 떼 같은 언론인들을 다룰 때만큼 집중하기 좋은 때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문 : 배로스 씨, 뱀파이어 보좌관으로 선출됐다고 하셨죠? 현실과의 괴리감에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았나요?
답 : 그를 만났을 때 잔뜩 겁에 질렸었죠. 생생한 공포에 저절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어요. 그에게는 날카로운 송곳니도 있죠. 네, 맞습니다. 전 뱀파이어와 한 팀이 됐어요.
문 : 그는 인간을 먹나요?
답 : 자기 말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요.
문 : 그 말을 믿습니까?
답 : 의심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지금까지는 말이죠. 네, 헬렌, 질문하세요.
문 : 미국 정부는 다른 초자연적 존재들도 고용하고 있나요? 국무부에 늑대인간도 있습니까?
답 : 그건 국무부에 직접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건 국세청에 좀비가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뱀파이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말씀드릴 게 없어요.
문 : 나눠 주신 자료를 보면 뱀파이어가 태양광과 불에 약하다고 나와 있군요. 마늘은 어떤가요? 은은 또 어떻죠?
답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그에게 마늘 피자나 보석을 사준 적이 없어서요.
(웃음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진다.)
문 : 운멘쉬졸다텐이라는 위협적인 존재 말인데요.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할 것 같군요.
답 : 질문만 받습니다.
문 : 계속 나오는 ‘지하 세계’는 대체 뭘 말하는 겁니까?
답 : 기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문 : 모른다는 말씀이군요.
답 : 이만 기자회견을 끝내겠습니다.
문 : 배로스 씨, 이 일이 정말 하고 싶은 평생의 소원입니까?
답 : 모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pp.126~127